지난 세기 말, 80년대에는 한 때 참새 시리즈, 식인종 시리즈 등 시리즈 농담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 중 한 대목.
식인종이 밀림에서 식량(?)을 구하다 우연히 하늘을 보았다. 여객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식인종이 소리쳤다. “야, 통조림이다!”
인육을 생각하면서 군침을 삼키는 인간은 없다. 누군가 인육을 먹는다면 정신병에 걸린 상태이거나 아사에 몰린 상태에서 먹을 것이 인육밖에 없는 경우가 아니고는 모두 고도의 상징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역겨움을 극복하고 인육을 씹도록 강요하는 것은 그들의 문화적 환경, 곧 문명이다. 프로이트는 『문명과 그 불만』에서 정신분석이론의 토대를 이루는 “원초적 아버지”에 관한 신화를 들려주면서 역설적으로 인간이 인육을 먹는 순간을 문명이 탄생하는 순간으로 그리고 있다. 최초의 아들들은 최초의 아버지를 죽인다. 그리하여 강자의 임의가 지배하는 법 이전의 세계, 곧 야만을 끝장낸다. 아들들은 형제들 사이의 사회적 협약의 상징으로 아버지의 살점을 나누어 먹는다. 아버지의 살점은 문명과 야만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선을 정하는 금기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형제들 사이의 관계 규칙을 세운다. 법과 함께 문명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비록 농담으로 포장되기는 했지만, 날아가는 비행기를 통조림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 인간은 금기에 제약되어 있는 문명인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한다. 그것은 문명인의 백일몽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사태는 문명 속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인간이 직접 인간을 사냥하여 인육을 즐긴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그럴 수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현실의 배후를 포착하는 하나의 은유로서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표현은 실재적이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실재적인 상황은 인류사에서 중단된 적이 없었지만, 이러한 상황이 대량으로, 그것도 제도를 매개로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시점은 하나의 문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확연하게 나타난다. 야만을 중지시키는 법이 그 자체로 야만이 되는 상황, 곧 역사 속에서 “대립물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순간이다.
이샛별의 <인터페이스 풍경>을, 이 아름다운 그림들을,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잠재적 의미들을 최단거리에서 가장 적절하게 포착하는 방법은, 이 그림들이 종말의 풍경을, “대립물의 통일”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서 헤겔의 무한판단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는 전제, 곧 선입견을 갖고 보는 것이다. 이샛별은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그림을 감상하는 꼴을 결코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작가이다. 그의 그림 중에는 “무제”라는 한가하고 나른한 제목이 붙여진 그림이 없다. 그녀는 일상의 기계적인 시간이 균열되면서 새어나오는 새로운 시간의 침입을 보고 있다. 그녀는 바로 이 긴급한 순간에 서서 이 새로운 시간의 재현 불가능성에 도전하고 있다. 회화는 이 불가능성을 길들이지 않은 채 어떻게 평면의 프레임 안으로 가져올 것인가?
전시회의 제목에서 ‘인터페이스’interface라는 개념은 슬라보예 지젝이 자신의 영화미학을 전개하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지젝이 헤겔의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개념을 영화미학, 혹은 이미지 미학에 적절하게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지젝은 『진짜 눈물의 공포』에서 인터페이스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외적 현실이 하나의 정합적인 전체로 보이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요소에 의해 “봉합”되어야 한다. 즉 현실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외적 현실에 인위적 보충물이 덧붙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인터페이스는 바로 이 층위에서 발생한다. 인터페이스는 “외적현실” 자체의 정합성을 지탱해주는 인위적인 스크린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대상 α, 즉 객관적-외적 현실을 구성하는 주관적인 요소이다(100).
상식적인 수준에서 인터페이스는 서로 다른 논리를 갖는 두 시스템 사이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 혹은 장치이다. ‘봉합’은 봉제 용어이다. 찢어지거나 벌어진 두 천을 바느질하여 하나의 천으로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이음매가 보이지 않는 짜깁기는 최고의 봉합기술이다. 영화이론에서 봉합은 스크린 상의 현실을 관객 자신의 현실인 것처럼 오인하게 만드는 영화적 과정을 지칭한다. 이를 위해서는 스크린 상의 현실을 자족적인 것으로, 어떤 외부의 개입도 필요 없이 영화적 현실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세계로 재현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길모퉁이 작은 가게가 화면에 비친다면, 이 장면은 영화 속의 어떤 인물이 바라보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가게 장면은 영화 속의 현실로 통합될 수 없다. 통합되지 않은 장면은 관객의 뇌리에 남아 영화 속의 현실에 몰입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방해하게 될 것이다. 즉 영화 속 세계의 전체성은 균열된다. 물론 영화의 모든 장면은 관객이 직접 바라보는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관객이 아닌 누군가가 직접 바라본 현실이며 촬영기계를 통해 재현된 현실이다. 관객은 남이 그의 관점에서 바라본 현실이 마치 자신이 현재 체험하는 현실인 것처럼 영화 속 세계에 몰입한다. 관객은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관점을 타자에게 양도한다. 혹은 자신의 관점을 영화의 관점을 통해 구성한다. 이것이 1960년 대 마르크스주의-정신분석 영화이론이 문제 삼은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이다. 주체는 없으며 주체효과만이 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이러한 주체효과를 통해서 관객을 자신의 현실로부터 소외시킨다.
반면 지젝의 인터페이스 개념은 봉합이론이 소멸시킨 주체를 영화관람 과정에서 구해낸다. 관객이 영화 속 현실을 자신의 현실인 것처럼 몰입하는 것은 영화에 의해 주체가 구성되어서가 아니다. 스크린 상의 비현실이 현실처럼 인식되기 위해 관객은 능동적으로 그 비현실을 보충한다. 지젝은 인터페이스 스크린을 영화미학의 정수로 본다. 그것은 관객이 보충한 것이 가시화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분열된 주체가 실제로 한 스크린에서 둘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하나는 현실적인 주체라면 또 하나는 그것의 유령과 같은 분신이다. 그것이 영화미학의 정수인 이유는 인간의 진실을 드러내는 영화의 역량이 그 순간에 가장 탁월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라는 비현실이 주체에게 하나의 현실로 작동하는 과정은 영화관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의 실제 현실에서도 일어난다. 만약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주체의 외부는 현실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없다.
정신분석은 인간을 분열된 존재로 본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우리 자신을 ‘나’라는 기표로 단번에 지칭할 수 있는 통합된 존재로 의식한다. 그렇다면 분열된 주체의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주체가 바라보는 세계 속에 있다. 세계는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주체가 욕망의 대상을 찾는 시선을 가지고 보지 않는다면 세계는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역으로 세계가 주체 앞에 전체적이며 완결되고 의미 있는 시공간으로 버티고 서 있을 때만, 주체는 자신을 통합된 하나의 인격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 주체의 외부를 하나의 세계로 존재하도록 보충하고 있는 것, 즉 세계를 그렇게 드러나도록 기능하는 주체의 나머지를 주체가 대면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주체는 사라지고 세계는 공백이 된다. 주체는 증발하고 세계는 파국을 맞는다. 주체와 세계의 총체적인 종말이다. 물론 그것은 특정한 세계와 함께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된 주체, 다시 말해서 특정한 주체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세계의 종말이다. 특정한 주체가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자신의 운명이 정지되고, 세계는 더 이상 자신의 논리를 견지할 수 없는 상황으로서의 종말이다. 주체가 자신의 무와 함께 세계의 공백에 던져지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순간은 절대 자유의 순간이다. 소외된 주체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주체가 발생하는 순간이다.
이샛별의 그림은 분열된 존재의 이중체가 동시에 드러나는 순간, 둘이 서로 맞닥뜨리는 순간, 그리하여 오인을 통해 통합된 하나의 인격은 증발하고, 바로 그 오인 속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던 세계는 정지하는 순간을 의도하고 있다. 그 순간은 화폭에 재현될 수 없다. 그 순간은 그림과 대면하는 관람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림은 어떻게 이 사건을 기획하는가? 우선 이번 전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드로잉을 보자. 이샛별의 그림은 작품 활동 초기에는 꽃무늬 프린트 바탕에 인물들을 꽃들에 가린 듯 드러난 듯 그려 넣는 방식에서 2008년 <아래로부터의 봄>전을 기점으로 구상회화로 전환하였다. 드로잉은 2010년 <다른 장면>전에서부터 히치콕의 영화 장면들을 모노톤으로 그린 소품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번 <인터페이스 풍경>은 모노톤의 드로잉이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것은 작가의 작업방식 전환을 의미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드로잉은 작가가 자신이 재현하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어떤 다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것일까? 이번 전시작들이 이전의 작품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또 다른 특징은 그림에서 인물들의 비중이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작가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했던 클로즈업에 가까운 인물묘사는 완전히 사라졌다. 자의식에 대한 현상학적이며 정신분석적인 탐구가 자칫 자의식의 과잉으로 오해되는 부담을 줄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얼핏 보면 그림은 편해졌고 작가는 자신의 장인적 능력을 한껏 발휘하여 세련되고 아름다워졌다. 일단 그림이 좋다. 관람의 부담을 줄이고 관람자를 그림이 일으킬 사건의 세계로 유혹하는 전략을 고심한 흔적이 여실히 보인다. 그렇다. 잔뜩 긴장해서 의식이 곤두서가지고서는 실재와 대면할 수 없다. 라캉은 그림 앞에 서는 관람자를 분석가와 만나는 분석주체와 비교하였다. 그렇다면 작가는 분석주체인 관람자에게 편히 기댈 수 있는 카우치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드로잉은 크게 두 가지 연작들로 나뉜다.
우선 <언데드> 연작은 제주도 4.3사건을 기리는 작품들이다. 작가는 이 사건을 형상화하기 위하여 제주도 4.3사건 유적지를 여러 차례 답사하였다. 1947년 남로당 제주지부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봉기한다. 봉기는 이듬해 4월 3일 미군정의 강압통치에 고통 받던 민중들에게 옮겨 붙는다. 이에 미군정과 남한정부는 폭력적인 진압에 나선다. 한국전쟁 이후 1954년까지 전개된 저항과 진압은 극우 지배세력에 의한 일방적인 빨갱이 사냥의 양상을 띤다. 이 7년 동안 제주도민 약 30%가 살해당한다. 4.3사건에 대한 유일한 영화 <지슬>(2012, 오멸 감독)은 당시의 한 장면을 통해 이 사건의 핵심을 파악하려 했지만 제주도의 비극에 대한 지극히 소박하고 낭만적인 시각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순박한 시골 농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숨어 지내다가 죽음을 맞는 영화는 지배세력이 도민의 삼분의 일을 도살해야했던 광기 이면의 공포를 전혀 해명하지 못한다. 물론 이 극단까지 몰린 공포는 잔혹한 진압에도 스멀스멀 다시 일어서는 민중의 저항 혹은 불복종이 갖는 압도적인 위력일 것이다. 민중의 힘은 결코 숫자의 많고 적음이나 무장한 정도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들의 힘은 끊임없이 다시 일어서는 반복 행위에 기인한다. 이 반복적인 행위야말로 인간의 역사에서 폐쇄된 체제를 무너뜨리고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열어온 근본적인 동력이 아닐까? 작가는 4.3 사건을 기념하는 연작의 제목을 “언데드”undead로 지칭한다. 그것은 제거하려 했으나 제거할 수 없었던 것, 존재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 했으나 오히려 존재 자체를 위협하며 되돌아오는 것, 결코 생물학적 죽음이 잠재울 수 없었던 것에 붙이는 이름이다.
그림은 인물들과 나무가 뒤얽힌 형상을 보여준다. 작가는 제주도를 답사하면서 60여 년 전 그 아름다운 땅을 뒤덮었던 주검들을 양분 삼아 자라난 나무들, 제주도의 거센 바람 속에서 그 바람의 비명을 닮아가며 자라왔던 식물들의 형상에서 봉기 주체들의 비죽음을 본 것이 아닐까? 인물들은 침묵 속에서 정면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다. 이 침묵의 시선을 식물들이 절규로 드러내고 있다. 인물들은 침묵하지만 식물들은 절규한다. 그렇다면 이 인물들은 단지 과거의 인물들인 것만은 아니다. 이샛별은 주위의 친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 인물들의 모델로 삼는다. 이 침묵하는 인물들은 4.3 사건의 와중에서 무참히 죽어간 사람들인 동시에, 나무의 외침이, 꽃의 노래가, 식물들의 몸부림이 식물들의 영원한 생존과 함께 다시 불러들일 비죽음의 상징이다. 그들의 시선은 한 파국의 순간에 응결된 채 바로 그 순간이 다시 반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섬뜩한 그림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얼어붙는다. 이 응결된 순간은 오직 현재 남한의 기득권자들에 의해 구성된 선형적 서사가 중지되는 순간에 가시화된다. 예컨대 “한강의 기적”이라든가 보릿고개를 넘어 도달한 G20 국가라든가 하는 오늘까지 간단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매끄러운 이야기 말이다. 그림 속에서 무수히 날아드는 까마귀들은 바로 이 순간을 상징한다. 이 까마귀들은 2010년 <다른 장면>전의 히치콕 연작 드로잉에서부터 작가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그의 영화 <새>에서 자족적인 현실에 균열을 내는 실재를 인간을 공격하는 새의 형상을 통해 구현하였다.
다음은 울창한 숲이 화면을 뒤덮고 있는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풍경의 뒤> 연작들에서 <진공지대> 연작들 그리고 <인터페이스 풍경>으로 이어진다. 세 연작들은 거의 동일한 공간적 구성을 갖고 있다. 화면의 삼분의 이 이상을 차지하는 소재는 압도적인 숲이다. 숲은 화면 위쪽으로 위압적으로 배치되었으며, 나머지 아래쪽은 숲의 입구라고 할까, 아무튼 숲과 구별되는 도로, 혹은 숲으로 이어지는 다리 등이 보인다. 이 연작들은 우선 그림의 규모에서 차이가 있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그림은 그만큼 배치된 소재들도 적다. 우선 이 세 연작들의 소재를 살펴보자. 숲 쪽에는 트레킹 차림으로 숲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는 사람들, 사진을 찍은 사람, 탐방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목재 구조물에서 산책하거나 풍경을 조망하는 사람들처럼 비교적 자연스러운 인물들을 필두로, 다양한 인물과 사물들의 형상이 배치된다. 수도사 혹은 수녀 복장을 한 사람들, 코끼리를 타고 숲으로 들어가는 사람, 기타를 든 사람, 기도처에 모인 사람들, 얼굴 없는 인물, 원뿔 형상의 인물, 첨탑의 건물, 하늘의 인공위성이나 발광체들과 괴 비행체, 천사상 혹은 어떤 인물의 동상들 등등은 거의 원시림에 가까운 숲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탈맥락적인 소재들이다.
숲의 아래쪽에 그려진 풍경은 대체로 숲으로 향하는 도로로 보인다. 이 문명의 풍경은 마치 대규모 지진이 지나간 듯 파괴되어 있다. 끊어진 다리, 갈라지거나 움푹 꺼진 도로, 무너진 시멘트 구조물들을 배경으로 역시 다양한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물에 빠진 사람, 그를 구하려는 듯 달려가는 소년, 소방호스를 든 사람, 파괴된 장소를 조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그 주변에서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는 양복 입은 신사들… 이 잡다한 소재들은 그림의 배경과 관련해서 어떤 논리적 연관성을 지니는 것인가? 우리는 감상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이러한 의문을 해결할 실마리를 세 연작들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통해서 잡을 수 있다. 미리 말하자면, 역설적으로 이 차이는 <언데드> 연작을 포함하는 모든 드로잉 작품들이 동일한 논리 구조 속에서 포착된 풍경이라는 사실을 보증하는 동시에, 드로잉이라는 새로운 시도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까지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가장 확연한 차이는 바탕색이다. <풍경의 뒤> 연작들과는 달리 <진공지대>와 <인터페이스 풍경>은 검푸른 바탕 위에 그려졌다. 작가는 이 색조에 대해 매우 직접적이고도 단순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세월호 참사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 전시 작업 중에 세월호 비극을 접했고 그 어처구니없는 참사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이 보았을 세계를 이 검푸른 바탕색으로 형상화하였다. 하지만 화면을 무겁게 내리 누르는 푸른색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구도 자체가 달라진 것은 없다. 드로잉으로 포착한 세계는 그 바탕이 흰색일 때도, 검푸른 색일 때도 같은 구조를 갖는다. 그녀가 포착하는 세계는 <언데드> 연작에서부터 이미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들을 대량살상하는 체제이다. <언데드>의 세계와 <진공지대> 그리고 <인터페이스 풍경>의 세계가 다른 것이 있다면, <언데드>에서는 저항이 압살되어야 할 체제에 대한 위협이었다면, <진공지대>와 <인터페이스 풍경>의 세계에서는 저항이 오히려 체제 자체의 동력으로 전환되었으며, 대량살상은 더 이상 권력의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에 의해서 빚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체제가 작동되는 논리적 메커니즘 자체의 과정 속에 포함되었다. 즉 대량살상은 이제 비인격적 방식으로, 따라서 겉보기에 매우 합리적인 과정의 부산물로서 산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인간과 화물들을 잔뜩 싣고 기우뚱거리며 바다를 항해하다가 그 모든 것을 수몰시켜 버리는 세월호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죽어간다. 다만 그들의 죽음은 체제가 작동하면서 배출하는 합리적인 부산물로서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살해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의 죽음은 매끄럽게 봉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가 구체적 보편의 성격을 갖는 이유는 바로 그 참사가 봉합된 지점에서 삐져나와 참혹하고 역겨운, 견딜 수 없는 실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우발적인 비극 속에서 오늘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대의 논리가 중첩되고 있음을 본다. 세월호 사건을 접한 사람들이 느낀 자기모멸, 즉 ‘부끄러움’은 실재와 대면한 주체가 겪는 핵심적인 정동이다. 그것은 스스로 ‘무엇임’으로 오인하던 존재가 자신의 ‘아무것도 아님’ 앞에 노출되었을 때 느끼는 정서이다. 이 정서로부터 전혀 상반된 두 개의 가능성이 주체 앞에 놓인다. 하나는 현실원칙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즉 가능한 한 긴장을 줄여 생물학적 생명을 연장하려는 유기체, 곧 짐승으로서 반응하는 것이다. 성급히 현실로 침입한 실재를 현실 외부로 몰아내고 그 지점을 다시 봉합한다. 주체는 다시 자기 자신의 ‘무엇됨’이라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다. 사회안전망 구축 등등의 대책이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다시 ‘자연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반면 다른 길이 있다. 주체가 실재의 침입에 의해 드러난 자기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에 매혹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근거, 즉 무로 되돌아가겠다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그 순간 현실이 단순히 주체를 조건 짓는 외부 환경이 아니라 주체 자신에 의해 거기에 그렇게 서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즉 주체는 외부 현실에서 자기 자신의 분신과 맞닥뜨린다. 이른바 환상을 횡단하는 것이며, 충동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주체는 자기 자신의 운명과 그 운명이 펼쳐질 세계를 결정하는 절대자유의 순간에 선다. 그 순간을 그릴 수 있다면, 바로 ‘인터페이스 풍경’이다.
다시 이샛별의 ‘인터페이스 풍경’에 징발된 소재들을 보자. 이 잡다한 소재들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그것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샛별은 그림의 소재들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채취한다. 여행에서 경험한 인상 깊었던 풍경들, 일상에서 접한 우연한 장면, 그녀가 본 영화의 한 장면, 대중 매체를 뒤지다가 혹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만나게 된 그녀의 시선을 끄는 이야기나 이미지들이 그 소재들이다. 이 맥락 없이 동원된 소재들 사이에 외연적인 논리적 관계는 없다. 이 소재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이 있다면 단지 그것들이 그녀의 시선과 관심을 잡아당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소재들이 아무런 연관성도 없이 제각각 제공하는 우연한 쾌락을 즐기자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소재들을 배후에서 연결하는 논리에 접근하는 방식으로서 정신분석 임상기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에 접근하는 매우 훌륭한 통로로 평가한다. 꿈의 세계는 기이하다. 그 세계의 논리적 일관성이 무너져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지각 있는 사람들이 꿈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평가절하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꿈이 무의식의 언어를 고유의 논리로 전하고 있으며, 무의식이 말하는 방식은 응축과 전치라고 주장한다. 꿈이 응축과 전치를 통해서 왜곡해 놓은 메시지에 의식이 접근하는 방식은 ‘자유연상’이다. 꿈을 구성하는 여러 소재 중 하나를 근거로 자유롭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말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자유연상이 결코 아무 맥락 없는 생각들의 나열로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의식의 자유연상을 끌어당기는 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인력이 산만한 소재들을 배후에서 연결하는 무의식의 논리이다.
작가로서, 카메라를 든 사람으로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마우스를 쥔 사람으로서,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 혹은 책장을 넘기는 사람으로서 이샛별은 자신에게 포착한 우연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평면 속에 배치한다.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 속의 한 분열된 주체에게 포착된 이미지들은 그 이미지들을 배후에서 잡아당기는 하나의 논리에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관람자들에게 일종의 열려진 꿈으로 제공한다. 관람자는 그림 속의 이미지가 연상시키는 자신만의 새로운 이미지의 연쇄를 구성할 수 있다. 이샛별의 그림이 하나의 촉매가 되어 일정하게 확대된 새로운 작품, 작가와 작품과 관람자들이 함께 구성하는 작품은 아마 현실 이면의 다른 장면을 축도할 수 있으며, 현실이 제한하는 다른 삶의 지도를 그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이샛별의 그림 속에는 침몰하는 유람선과 괴 비행체, 종교집단으로 보이는 사람들, 낯선 행성, 쏟아져 들어오는 깊은 숲이 한 장면에 있다. 이 잡다한 오브제들을 가로지르는 논리는 드러날 듯 감추어져 있으며, 또 반대로 감춰진 듯 드러나 있다. 그것은 이샛별이라는 특정한 개인을 통해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는 배후의 논리이다. 이 배후의 논리는 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분열된 주체들의 내면에서 보편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실재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예술가로서 실재의 “전령사”로 위치 짓는다. 실재는 무엇일까? 길게 말할 수는 없다. 실재는 불가능한 실재이다.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경험할 수 없는 실재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물론 실재는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존재’로 존재한다. 아주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유낙하운동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 법칙은 실험실의 진공상태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결코 그 법칙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없다. 현실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은 낙하하는 물질의 부피, 공기 저항, 바람의 세기, 기압 등등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현실에서 낙하하는 모든 물체의 운동을 규정하는 배후의 논리일 뿐이다(지젝, Absolute Recoil, p. 11). 이샛별의 주의를 끈 그림의 소재들을 규정하는 것은 현실을 작동시키는 실재, 즉 배후의 논리이다. 현실은 주체의 욕망의 시선과 함께 대량살상체제로서 거기 그렇게 의연히 작동한다. 진공지대는 실재가 자신을 가시화하는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채색 유화를 보자. 개인 감상자로서 필자는 무엇보다 바로 이 작품들에 경탄하고 있다. 모든 그림에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새는 사람들, Nighthawks>을 연상시키는 긴장이 있다. 이 유사성이 단순히 프레임 속의 프레임이라는 이중구도에서만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장면을 그것을 가시화하는 프레임과 함께 묘사하는 방식은 그림이 오브제가 아니라 회화 그 자체를 반영하는, 즉 그림의 오브제가 회화가 되어 자기를 반성하는, 그리하여 회화의 개념 자체를 바꾸는 고유하게 현대적인 전략이다. 그러나 이샛별의 그림을 호퍼의 그림과 전혀 다른 차원에 놓는 것은 프레임과 프레임 속의 장면들이 서로 불가능한 방식으로 연동되어있다는 점이다. 호퍼의 그림 속 장면들이 투명하고 명확한 의미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실재에 접근한 사람들의 불안, 즉 주체가 공백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의 경계지대를 이미지화하고 있다면, 이샛별의 그림은 바로 그 긴장과 그것이 폭발한 찰나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이샛별은 프레임 속의 프레임을 회화적으로 조작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빛을 통제하여 이를 구현한다.
회화에서 프레임은 공간이 구성되는 근거이다. 프레임은 일종의 시각체제가 구성되는 형식을 규정하며, 이를 바탕으로 회화 속에 구상된 이미지들은 안정성을 확보한다. 다시 말해서 회화 속의 이미지들은 프레임을 통해 규정되며 프레임은 그 자체로 프레임 내부의 장면들을 보는 방식을 지시한다. 프레임은 보는 방식을 규제하는 일종의 대타자이다. 하지만 이샛별 그림 속의 프레임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 프레임 안에 배치된 소재들 속에서 시각체제를 구부러뜨리거나 깨트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밤의 중력>을 보자. 가장 크게 구성된 창 안에서 한 여인이 거울을 보고 있다. 하지만 여인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다. 익숙한 자신의 얼굴을 보는 표정이 아니다. 이 순간은 침대칸에서 기차여행을 하던 프로이트가 자기 방에 들어온 불편한 낯선 사내가 바로 유리에 비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두려운 낯설음」)의 그것이 아닐까?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라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 순간 느끼는 섬뜩함은 오인 속에서 구성된 내가 잠시 소멸하는 순간,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세계마저 심연 속으로 꺼져버리는 순간의 느낌이 아닐까? 빛은 바로 이 순간에 발생한다. 시력의 한계를 넘어 분출되는 빛은 순간적으로 세계를 하얗게 날려버린다. 프레임이 깨지면서 발생하는 빛은 바로 인터페이스의 순간에 발생하는 폭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세계를 지시한다. 이 빛은 이샛별의 드로잉에서도 곳곳에서 작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다노출에서 발생하는 빛이 나머지 창문 속의 장면마저 조명한다.
이 인터페이스 효과로 인해서 장면들은 명확한 격자 구조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틀을 넘어 쏟아질 것만 같으며(<녹색 방>, <밤의 중력>), 또 프레임 내부에 있어야 할 인물들이 프레임 외부에도 나타나게 된다. 프레임 자체가 장면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우발적 기억 1, 2>, <산책자>). <녹색 방>과 <밤의 중력>에서 장면을 제시하는 화면 속 프레임은 장면을 담을 수 없게 탈구되어 있으며, 프레임이 현실적일 때에는 그림 자체에서 얼룩이 번지거나(<산책자>), 프레임 내부의 장면이 뭉개지지 않으면(<우발적 기억 1>), 비현실적인 인물이 등장한다(<우발적 기억 2>). 인터페이스의 순간에 프레임과 프레임 속 장면은 동시에 정상적일 수 없다. 인터페이스의 순간은 대상 α가 가시화 되는 순간이고 세계를 질서 있는 것으로 떠받치는 대타자의 결여가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상상적 자기 인식의 결과인 자아주체와 그것이 바라보는 정상의 세계가 동시에 붕괴하는 순간이다.
<녹색 방>에서 프레임 속 식물원 풍경은 <녹색파국>전의 주제를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주체 자체를 형식을 통해서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욱 탁월하다. 식물원은 원래 과학의 공간이었으나, 오늘날은 유희의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그곳은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을 박제된 상태로나마 누릴 수 있는 환상의 장소이다. 그곳에 실재로서의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식물원이나 동물원 혹은 수족관은 ‘자연’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드러내고 있다. 자연은 그렇게 인간의 문화에 의해 포획된 상태에서만 인간에게 의미 있는 어떤 것으로서 자연이 된다. 의미 있는 자연은 그것이 인간의 다양한 차원의 삶과 관련해서 가지는 기능을 통해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쾌적한 환경’, ‘생명의 어머니’, 인간이 돌아가야 할 고향, 나아가 인간과 교감이 가능한 영적 실체 등등이다. 하지만 실재로서의 자연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의미 외부의 것으로서 불가해한 것이다. 자연의 철저하게 무의미한,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현존은 인간이 구성한 비자연적인 차원, 즉 문화에 대한 궁극적인 위협이다. 인간의 문명은 바로 그 무의미하며, 불가능한 실재와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생태적 위기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자연을 지구라는 행성에서 삶을 공유하는 파트너로서 적절하게 배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 자체가 ‘자연화’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이라는 비인격적 실체가 인간 사회의 주체가 되어, 인간의 삶을 자신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상황, 혹은 ‘약육강식’이라는 생물학적 논리가 그 자체로 인간의 윤리로 인정되는 현실은 인간의 문명이 그 비자연성을 상실하고 짐승들의 세계로 퇴행하는 ‘자연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녹색 방>은 식물원을 구경하는 인간, 아쿠아리움을 관람하는 인간을 그들이 즐기는 대상들과 함께 프레임화하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즐기는 인간이 그 자체로 관람의 대상이 된다. 잘 생각해 보자. 그림 속의 인물들이 즐기는 것은 사실 자연이 아니라 상품이다. 심층생태주의는 생태적 위기를 멈추는 데 성공하고 있는가? 오히려 위기를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가는 힘, 자본의 무한 증식 과정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새로운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과정에서 유기농 상품을 사용할 수 있는 자와 그럴 수 없는 자라는 새로운 인종차별을 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인간을 생명의 어머니 자연을 존중하고 섬기는 고매한 영성의 인간과 그렇지 못한 삼류인간으로 구분하는 상상적 나르시시즘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 나르시시즘은 오로지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이 보장해준다. 나아가 사이비 저항, 유사 윤리, 실천과 참여의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은가?
실재로서의 자연은 오히려 이샛별의 드로잉에서 제 본모습을 드러낸다. 그 압도적인 위용, 숲 전체가 쏟아질 것 같은 그 무시무시한 풍경에서 자연은 도무지 그 실체를 알 수 없으면서도 자신의 존재와 종의 무한 확장을 주장하는 사물-생명 본연의 모습을 보인다. 드로잉에서 무너진 도로와 다리는 마치 이 무시무시한 자연의 육박이 초래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사실은 그 반대이다. 무너진 다리와 도로의 현실이, 즉 인간의 문명을 구성하는 상징체계가 붕괴된 상태가 자연을 문명 그 자체를 위협하며 침입해 들어오는 괴물로 만드는 것이다. 자연은 문명의 어머니가 아니다. 문명은 자연과의 분리, 즉 거세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문명은 말하는 존재들, 언어를 통해 세계에 이름을 짓고, 존재하지 않았던 의미를 발생시키며, 바로 이 의미의 체계 속에서 자신들과 세계의 의미를 규정하는 존재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고향은 원초적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들이 나누어 먹은 아버지의 살점이 상징하는 것, 곧 상징적인 규약으로서의 법이다. 현대문명이 가져오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위협 앞에서 원초적 자연이라는 몽매주의 속으로 퇴행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기회도 놓치게 만들 뿐이다. 이 몽매주의가 스스로 지각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지각이 이 문명을 낳았다고 지탄받는 데카르트의 투명한 주체, 자기 자신의 통일성 안에서 합리적으로 사유하는 주체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페이스 풍경은 기존의 상징체계가 더 이상 실재를 봉합할 수 없는 순간에 발생하는 장면이다. 이샛별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 하나의 시대가 자신의 운명을 다하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다. <산책자>는 바로 이러한 작가의 주제의식을 거의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창문 속의 여인은 권총을 들고 있다. 이 장면 속은 여인은 그 총을 쏘려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쏘아버린 것일까? 배경에는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서 자신의 역사 개념을 형상화하는 그림으로 해석하여 유명해진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가 선명히 그려져 있다.
우리들 앞에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발터 벤야민 선집 5』, 339).
역사의 천사가 하려는 일은 역사의 흐름을 중지시키고, 죽은 자들을 되살리고,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하나로 모아서 다시 결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천사를 미래로 밀어붙이는 ‘진보’라는 폭풍에 의해 불가능해진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겠지만, 벤야민이 진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위의 인용문 몇 줄 앞에서 그가 기술한 한 문장만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적들이 역사적 규범으로서의 진보의 이름으로 그 파시즘에 대처하기 때문이다”(337). 그림 속의 여인은 이미 총을 쏘았다. 다시 벤야민은 위의 인용문 몇 쪽 뒤에서 1830년 프랑스 7월혁명 당시 한 목격자의 증언을 인용한다.
누가 믿을 것인가! 사람들 말로는 시간에 격분하여
새 여호수아들이 모든 시계탑 밑에서
그날을 정지시키기 위해 시계판에 총을 쏘아댔다고 한다(346).
인터페이스 풍경은 필연성에 붙들린 시간이 정지하는 순간이다. <산책자>는 산보자 보들레르가 1880년 대 파리의 풍경 속에서 종말의 이미지들을 수집하기 위해서 파리를 샅샅이 발로 뒤졌듯이, 오늘 자신이 사는 세계의 풍경 속에서 시간의 중지와 종말의 이미지들을 찾아내 이렇게도 저렇게도 맞춰보는 이샛별의 작업 자체를 형상화한다. 시간이 정지하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아무도 모른다. 다만 대다수 인간의 삶을 무의미와 죽음으로 몰아가는 오늘 여기를 지속시키는 시간장치는 파괴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