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샛별의 작품에 등장하는 자연과 그 안의 인간은 ‘자연스럽지’ 못한, 어색한 공존이 특징적이다.

[진공지대] 시리즈에 나오는 숲은 푸르긴 한데 생기발랄한 초록이 아니라 창백함이 느껴진다. 지상이기보다는 해저풍경같은 [진공지대]는 시간차를 두고 일어났던 충격적인 대량 수몰 사건도 연상시킨다. 요즘 그리고 있는 ‘녹색 에코’ 시리즈가 빛바랜 플라스틱 식물의 색처럼 생경한 녹색임과도 비교될 수 있다. 인공물은 막 생산되었을 때는 어떤 자연물보다도 생생해 보이지만, 자라지도 죽지도 않고 단지 낡아서 폐기될 뿐인 자연의 시뮬라크르이다. 일찍이 인간의 자리를 위해 밀어낸 자연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생산과 소비의 광적인 주기 속에 함께 늘어난 폐기물이다. 바다를 떠도는 쓰레기 섬이나 가난한 나라로 수출되는 선진국의 쓰레기 등은 폭탄 돌리기처럼 지구 생태계를 위협한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일련의 자율성을 쟁취한 후 이루어진 자연 착취와 관련된다.

원래의 숲에는 피톤치드를 비롯하여 상쾌한 공기로 가득해야 하지만, 이샛별의 작품에서는 ‘진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최근의 ‘녹색 에코’ 시리즈에서는 진공 공포증이 느껴지는 빽빽한 숲이 특징적이다. 나무 덩굴이기보다는 전선 뭉치처럼 보이는 인공밀림이다. 따라서 그 속의 인물들 역시 인간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다. 몇 년 전 전시의 제목이 ‘인터페이스의 풍경’임을 생각해 볼 때, 이 진공지대들은 제2의 자연인 사이버스페이스와 비교할 수 있다. 이샛별의 작품에서 비유된 제2의 생태계는 얽히고설킨 난맥상을 보여주며, 그러한 복잡함은 신비와 공포의 동시적 근원이 된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의 숭고미 등에서 말해지던 신비와 공포가 아니다. 근대 낭만주의의 숭고는 산업혁명에 의해 자연이 대량적으로 수탈되기 시작된 시대였고, 식민지 쟁탈전을 통해 시장은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 일로에서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예감한 자연의 면모일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에서 개진된 프레드릭 제임슨의 숭고와 비슷한 맥락이다. 최신의 숭고는 부자연스러운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자연재해, 또는 세계 시장화로 더욱 첨예해진 이해관계가 낳는 파국적 결말과 관계된다. 갑작스러운 불행은 자신과 관계없는 먼 곳으로부터 온다. 이샛별의 [undead] 시리즈에 나타나는, 빽빽한 배치의 인간들이 암시하는 바도 그것이다. 작품 속 숲이나 나무 등은 농지나 정원처럼 인간의 이익과 취향에 맞게 잘 배열되어 있지 않다. 듬성듬성 어떤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연결된 길은 보이지 않는다. 작품 [진공지대-안내자]는 제목과 달리 중간이 씽크홀처럼 푹푹 꺼진 이어지지 않는 숲속의 길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선형적인 길 대신에 빛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미지가 있다. 작품 [진공지대-세 개의 빛]에서, 숲에서 의식을 치르는 사제들, 뉴욕 증권가의 상징인 소, 한쪽에서는 구덩이를 파는 사람들 같은 뜬금없이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더 이상 선적인 인과관계에 의해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이다.

미디어 이론가인 마샬 맥루한은 근대의 선적 인과관계를 ‘시베리아 철도 길’ 같다고 은유한 바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인쇄문화에 바탕 하며, 문자로부터 비롯된 내밀한 자의식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전기와 전자를 통한 소통은 철도와는 다른 길의 이미지를 가질 것이다. 길이 아니라 점에서 점으로의 순간이동인 것이다. 길이 안 보이는 만큼 의미의 차원에서도 연결고리가 없다. 또는 숨겨져 있다. 이해하기도 이해받기도 전에 쓸려간 사건들이다. 모든 것이 코드화되어 투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기대되었던 인터페이스에는 합리적 이해로는 불가능한 인간의 욕망이 착종하는 무대가 되었다. 기술적 시스템은 합리적으로 설계될지 모르지만, 그것을 추동하는 힘은 반드시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작품 속 검은 두건 하얀 두건 등을 입은 의례의 수행자들은 마치 ‘중세의 어둠’을 떠오르게 하는 반(反)계몽주의적 이미지이다. 그들이 쓰고 있는 뾰족한 가면은 고요한 행동거지 가운데서도 공격성이 느껴진다.

암울한 예견의 암시는 작품 [진공지대-전령사]에서도 발견되는데, 거기에서 공중부양 중인 전령사는 검은 옷을 입고 있다. 흑마술과 백마술이 있다면 흑마술인 것이다. [진공지대] 시리즈에서 군데군데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행동 또한 숲이라는 원초적 치유의 장소에서의 그것과는 괴리를 보인다. 가령 작품 [진공지대-조우]에서는 한 사람을 굴복시키고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장면이 있다. 하기야 사이버상의 폭력으로 죽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이해 못 할 장면도 아니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숲은 불연속적인 여러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한데 배치할 수 있는 가상의 무대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는 공중부양부터 비의적 제의까지 무엇이든 가능하다. 회화지만 꼴라주적인 방식의 구성은 디지털 생태계에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작가에게 회화는 짜깁기된 현실을 이음매 없이 연결시켜 줄 수 있는 매체이다. 그러나 최근의 작품에서의 숲은 보다 빽빽하고 인간을 닮은 캐릭터 한 쌍이 등장하는 한 두 장면에 포커스를 맞추는 변화를 보여준다.

배경과 모종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사건의 이물감은 여전하다. 자연이 사라질수록 자연의 흉내를 내야 하는 영역도 확장된다. 숲이 아니라 나무 한 그루가 등장하는 작품도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프랙털 이론도 암시하듯이, 식물 하나는 그 자체로 숲이다. [the bed] 시리즈에서 철제 침대들이 층층이 있는 가운데 있는 식물들은 마치 선반 위의 분재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인간의 취향과 눈높이에 맞게 재가공된 대상이다. 그러나 작가는 침대 또는 선반 아래를 텅 비워 놓아 대지로부터 뿌리가 분리되어있는 식물들을 보여준다. [undead] 시리즈에서 식물 하나가 뚝 떼어져 나와 마찬가지로 어디선가 떼어져 나온 사람들과 얽혀 있는 이미지 또한 뿌리 뽑힌 존재를 암시한다. [풍경의 뒤]에서 종종 보이는 땅 꺼짐 현상 또한 인간과 자연이 발 딛고 뿌리내리고 있는 기저 면에 대한 불안정성을 암시한다.

[undead] 시리즈는 식물과 인간이 한데 얽혀 있는 모습이다. 식물 뒤에 인물이 숨어있는 듯한 작품 [undead2]와 [undead3]는 필자가 처음 보았던 이샛별의 개인전 ‘위장’ 전(2001)에서의 형식이 발견된다. 2000년대 초기 작품에는 활짝 핀 꽃나무 뒤의 사람이 위장하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때도 인물의 눈동자가 없는 등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자연계에서는 주변과 같아짐으로써 죽음을 연기하는 종들이 종종 발견되는데, 이러한 위장의 기술은 진화의 과정 동안 증명된 유력한 생존 기술의 하나이다. 눈의 독특한 처리방식은 동물의 의태(mimicry)를 비롯한 위장이 시각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임을 알려준다. 타자의 시선을 재생해야 하는 현대는 위장이 상시화되어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기계적 반복으로 귀결된다는 점이 문제일 따름이다. 작품 [풍경의 뒤 2]처럼 얼굴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과도 호환될 수 있어야 기능적일 수 있는 현대 인간의 모습을 압축한다. 이제 AI의 시대가 성큼 다가오면서 인간의 얼굴은 점점 더 지워진다.

최근의 작품에서 작가는 뜯겨진 얼굴 뒤로 보이는 내장으로 인간을 형상화하기도 했다. 뇌의 자리에 있는 창자들은 인간이 그리 이성적인 동물은 아니라는 것, 기계와 유기체의 결합체 또한 그러한 불투명함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암시이다. 임상병리학적 시선은 인간의 몸을 투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였지만, 생로병사에 관한 최후의 비밀은 인간적인 영역을 벗어나 있다. 사이보그적 존재로서의 인간상은 작가가 SF영화나 사이버 공간에서의 마케팅 전략 등을 언급할 때 언뜻언뜻 드러나고 있다. 인간은 보철을 통해 전능함에 성큼 다가갔으나 자신의 또 다른 뿌리는 극복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인간은 장 디디에 벵상이 [인간 속의 악마]에서 말하듯이 ‘신의 모습을 닮은 동물’에 가까울 것이다. 인간은 전능한 도구를 다루게 되었지만 목적을 잃어버렸다. 자연스러운 데라고는 없는 자연을 표현하는 이샛별의 작품에서 잡종 피조물은 자주 발견된다.

다나 해러웨이는 [유인원, 사이보그, 여자-자연의 재발명]에서 사이보그적 존재론을 일반화하면서, 이제 몸들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어디에서도 순수한 자연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에 ‘결정 절차, 전문가 체계, 자원 투자 전략’(다나 해러웨이)이 자리한다. 몸은 정치의 영역에 온전히 복속된다. 군중들 앞에서 죄수의 목을 치던 시대가 거시정치의 시대라면, 이제 개인 스스로 알아서 시스템에 맞게 조절하는 미시정치의 시대이다. 장 보드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주장하듯이, 정보화 사회에서는 거리감이 사라진다. [undead] 시리즈에서 인간이 꽃과 열매가 있는 식물을 관조하거나 가꾸는 모습이 아니라 겹쳐있고 얽혀 있다. 이러한 분리 불가능은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이상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합일은 합일인데 정신이 아닌 육체적 합일, 즉 죽음이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모든 식물 아래에는 인간의 시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대지는 선사시대를 포함한 긴 시간 동안에 죽어서 쓰러져간 수많은 유기체들의 무덤 아닌가. 그러나 순리를 거슬러서, 즉 자연적으로 주어진 삶이 단번에 몰수당하는 불행한 역사적 사건들도 있다. 자기 영역을 넓히기 위해 행해졌던 타자에 대한 폭력은 야생동물에게서 먼저 일어났다. 작품 [The Bed3]에서 동물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인물은 타자로서 한 묶음이 된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말해준다. 소유와 축적의 기능을 탑재한 약육강식의 세계는 자연보다 더 잔인하다.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근대 이후로 그러한 대량적 사멸은 상시화되었으며, 전 지구적 차원으로 빠르게 전염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에서 그 ‘인간’이라는 기준은 매우 협소하게 정의되었다. 가난한 사람들, 식민지의 국민들, 소수민족, 유색인들 등이 인간 대접을 받은 지는 오래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끝없는 투쟁과 희생을 통해 이뤄낸 것이다. 이샛별의 작품에서 타자화된 자연, 여기에는 민초(民草)들도 포함된다.

실제로 작가는 민간인의 대학살이 벌어졌던 제주 4.3 항쟁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람들이 암매장된 장소에서 사람 머리 크기만 한 고구마가 자라났다’는 매우 사실임직한 소문 등을 전해준다. [undead] 시리즈는 묻히는 역사, 자연화 된 역사의 면모가 있다. 자연은 암시할 뿐이다. 자연이라는 텍스트는 해독되어야 한다. 이전 시대에는 주술사나 신학자, 근대 이후에는 과학자나 역사가가 했던 과업을 예술가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묻혀있는 진실들을 다시 발굴할 수 있다. [풍경의 뒤] 시리즈는 가려져 있는 뒤를 전경화 한다. 문명의 구조물을 뒤덮는 나무 덩굴을 보여주는 [풍경의 뒤 5]나 질감이 풍부한 숲속 사람들이 홀로그램처럼 희미한 [풍경의 뒤 6]에서 역사는 다시 미몽에 빠지고 인간은 정보의 배열로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문명 비판적인 성격이 강한 이샛별의 작품에서 희망은 거둬지지 않는다. ‘아직 살아있다’라는 전시 부제는 그래도 무언가 살아있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