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템포러리 아트 저널 2014. VOL 20
이샛별의 근작 회화 안에는 세계가 원초의 지점으로 회귀하려는 듯한 역회전, 자연의 복수에 의해 총체적인 파국이 예정된 인간의 문명에 관한 예감이 아른거린다. 짙푸른 단색조로 묘사된 원시림 중간 중간은 예기치 않은 인물들(수도사들, 폭력배, 깃발을 든채 배회하는 패거리들,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야영객들, 망원경을 든 관찰자)과 성당이나 군사용 유조탑, 감시초소, 불현듯 한 호수 혹은 늪에 정박된 배들까지 등장해 있다. 그 전경들 또한 비현실/초현실적이다. 도로가 함몰되거나 지진이나 대홍수 직후라는 재난의 흔적들로 살풍경하다. 저 멀리 원경으론 불길한 전조인 듯 선연하게 근접해 있는 행성이나 초신성, 혹은 위성체가 떠 있곤 한다. 어림셈에도 대자연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의 생장력 앞에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이니 종교니 문화니 하는 것들은 가소롭기 그지없는 가망 없는 짓거리임을 면치 못하는 대심판날의 참절한 풍경이다. 이상의 도상적 읽기에 하나의 표징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돌아와 금송아지를 부수고 불에 태우게 했다는 황금만능주의, 물신숭배의 황소도상이 그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굽어보는 산 정상에 우람하게 서 있는 황소, 혹은 얼굴이 없거나 원뿔 형상의 수도사들 앞에 현신해 있는 황소는 오늘 우리들 주체의 허위를, 그 가식의 껍질을 깬 실체를 보여주고자 했던 이샛별 회화의 사회학적 독해의 요체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 지점이 정신분석학적 비평에서 더 엄밀해진 이해의 문을 여는 지점이기도 하다. 예컨대 세월호 참사란, ‘대량살상’이 더 이상 권력의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체제가 작동되는 논리적 매커니즘 자체의 과정 속에 포함되어 있는”(정혁현-인터페이스 풍경 전시 도록 p28) 조용한 그리고 구조적인 ‘살해’인 것인데, 우린 그것을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도록 죽음과 살해 사이가 “봉합”되어 있다는 해석이다. 이샛별의 ‘(지젝?i?ek의 용어로) 인터페이스 풍경’이 그려 내려한 바가 이 봉합의 민낯인 셈이다. 회화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능한 역량은 이 봉합된 지점을 빠져나와 참혹하고 역겨운 우리들의 실재를 드러내 보여 줄 수 있다는 듯. 주체는 이곳에서 이 ‘현실’이라는 것이 그 자신이 만들고 동조했던 ‘보충’에 의해서 설립된 그것이었다는 ‘아뿔싸!’하는 끔찍한 부끄러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이곳이 ‘주체가 자신의 무無와 함께 세계의 공백에 내던져지는 순간’이자,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 순간은 절대 자유의 순간, ‘주체가 발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샛별의 이 의도는 성공적으로 구현되었는가? 또한 이 정신분석학적 기획 자체는 바람직한 방향인가? 필자는 여기에서 그 덕성과 함께 미래의 살펴져야 할 유의사항 정도를 말해 보고자 한다.
먼저 2009년 <실재 The REAL>, 2010년 <다른 장면>2014, 2012년 <서술되지 않은’ (Unnarrated), 2013년 <녹색 파국 Green Catastroph>, 그리고 이번의 전시로 이어지는, 일련의 ‘재현될 수 없는’ 분열된 존재의 이중체를 화폭에 재현해 보려는 정신분석학적 탐구의 여정이 보여 준 ‘진지함’의 덕성이다. 예술은 무엇보다 ‘사회로부터 직접 연역할 수 없는 사회’에 대한 사회적 안티테제인 것으로, 예술의 영역은 일차적으로 인간 내면의 구성, 즉 정신행태에 관한 이론인 점에서, 매끈하고 무책임한 물상物像들에만 전가하는 근래의 그 흔한 충동적인 개념미술과는 비교될 수 없는 미덕인 것이다. 그것은 예술 내부의 예술 아닌 것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었다. 즉 예술이 절대적 정신의 표출이라는 식의 통속적 관념론은 물론, 세계자체의 붕괴 상황에 관한 어떤 지표도 언급하는 일 없는 맹목적 물질주의로부터도 멀찌감치 벗어나 우리의 현실이 수많은 가장실재假裝實在(라캉 용어로 오브제a)들에 거주하는 분열된 주체들로 구성된 폐허(지젝의 언어로 ‘인터페이스 공간’)임을 자각케 함으로써 이제까지의 거짓화해로 잘 경영해 왔던 일상이라는 봉인을 해체한다. 그것은 미美 혹 진眞이라는 이름 아래서의 의미에 대한 합의를 외면한다는 점에서 예술 아닌 것, 예술 이전以前에 대한 주장에 가까울 터이다. 이미 그의 첫 개인전 <위장>(2001)이 ‘능력’이라는 이름 아래 세상과의 연대, 인간적 존엄과 같은 덕목들을 찾아볼 수 없는 사막으로 만들었던 이 사회의 병증을 비록 아직은 불구와 자폐적 도상을 표현하고 있었으나마 정면으로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을 소홀히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때로부터 그의 여정은 매우 일관되게 한 사회적 개인이 혼신의 힘으로 삶을 영위해 보려 무릎을 딛고 몸을 일으켜 세워보려 할 때마다, 머리를 부딪는 천장, 우리 사회의 그 유리 천장에 대한 감각의 보고문을 써 오고 있었던 것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더구나 이번 전시에 묘사된 것은 작품을 만든 실제 주체(본인)를 현격하게 감소시켜 그 몫을 형식법칙에 산입시킴으로써 소위 ‘표현이냐 형식이냐’의 안티노미를 본격적 성찰의 대상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어떤 성숙을 주목할 만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확실히 자의식적 인물의 현상학적 모호함이 극단화되었던 이전의 주인공들에 비해 개별 인물들의 비중을 줄여 ‘자연: 문명’ 혹은 ‘현실: 공백’과 같은 비교적 단선구도로써 예각화시킨 경우인 것이다. 필자는 이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대타자, 오브제a, 현실과 초현실 등등의 정신분석학 키워드들에 몰입했던 이전의 ‘구조화 욕망의 그림’들이 진지함을 넘어 난독의 요인이 되어왔기에 모종의 방향전환을 하게 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보다는, 그림이 개념의 구현물이 된다는 것은 아무리해도 결국 ‘의미’를 강박했던 전통적인 예술에서의 그것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논리적 귀결에 당도했던 때문이라고 보고 싶다. 예컨대 <진공지대>시리즈들에서는 이전의 <녹색파국>이나 <서술되지 않은>과 같은 전시에서의 신경쇠약 환자 같은 주체들의 묘사로부터 현격히 탈피하여, 나아가 그 흔적을 느낄 수 없을 만치 강력한 실재의 무자비함의 표현에로 향한다.
고장 난 상징계를 어떻게든 수리하면 회복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깨끗이 버린 분석가-의사의 절망인 듯, 한 줄기 섬광을 등불 삼아 드러나 있는 세계의 파열, 즉 현현顯現 epiphany 으로서만 스치듯 보여 주고 지나 갈 실재의 한 장면으로 드러내 보여 줄 뿐이다. 그림이 폭풍우 속 번개의 섬광 아래 드러난 찢겨진 자연의 몰골처럼 군데군데 함몰과 구멍이 있는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나의 자연성’에 대한 초상이 되는 때가 이때다. 또한 이곳이 이샛별의 회화가 유난히 상징계가 심각히 고장 난 이 사회의 네거티브 필름으로 현상되는 곳이다. 모든 장기臟器들에로 전이된 손 쓸 수 없는 말기암 환자의 엑스레이 필름, 그곳은 ‘지옥’인 것이다.
한편, 이들 <진공지대>가 허구라는 계기를 도입해 독자적인 무게와 부피를 아슬아슬하게 획득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지점 직후, 이 기획의 불안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를 짓누른 깊은 대양에 빠졌을 때의 중력의 악령인 듯<밤의 중력>, 도시의 아케이드를 산책하며 판타스마고리아에 매혹되어 있는 군중을 발견하는 벤야민에 대한 오마쥬인 듯<산책자>, 베르그송이나 프루스트의 무의지적 기억에 관한 시각적 번안물인 듯<우발적 기억1,2>한 예의 ‘오브제a’에 관한 연구물의 경우가 그러하다. 소위 프레임의 훼손, 대타자의 결여로서의 정신분석학의 자아연구, 즉 인터페이스 공간을 증명하려는 기획들에서라면, 이곳에서 예술은 무의식의 단순한 주관적 언어로 소환되는, 이전 시기의 그의 타성을 다시 보게 되는 듯 싶은 것이다. 예술작품을 예술가와 동일한 것으로만 해독할 것이 아니라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서도 해독할 수 있어야한다는 금언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정신분석적 예술이 왕왕 그대로 작품을 만든 작가 주체의 통각統覺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로 제시되는 경우들이 되곤 했던 것은 무의식이니 충동이니 하는 것이 예술적 생산과정의 하나의 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오인의 결과였던 것이다. 무엇이 주제로 그려져야 한다는 선차적인 ‘목표’에 따라 이후 ‘소재’들이 선별되는 끊임없는 조립의 과정이 수반됨으로써 그림이 개념의 구현이 돼 가는, 억지 창조물이 돼 갈 수밖에 없는 피로를 노출하게 될 우려를 말함이다.
사회를 대상으로 한 정신분석의 대상은 예술에서라면 작가 자신까지도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왜 그것을 표현하고자 욕구했는지?에 대한 욕망 분석이기도 하다. 아도르노의 생각에 의하면 예술적 재료란 물감이나 종이, 캔버스 등의 자연물 재료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그 재료들을 다루어 왔던 테크닉Technique, 즉 인공적 가공방식들의 역사까지도 포함시켜 보아야 하는 것이다.(아도르노, <미적이론>, 방대원 역, 이론과 실천, 1991) 거기서 연필이나 목탄, 콘테, 물감을 손에 쥐는 순간, 그 가공방식들의 기제는 나의 욕망과 뒤섞이면서 재료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이를 통제하려는 욕구 혹은 합리성의 준칙 사이에는 완결될 수 없는 끝없는 쟁투가 벌어지는 것이다. 언필칭 자연을 닮아가려는 미메시스mimesis와 이를 배열, 통제하려는 합리성Ratio 사이의, 표현Expression과 형식Form 사이의 구성Construction을 둘러 싼 변증법적이고 완결되지 않을 독특한 내적 운동을 말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윈도우가 필요하다. 소위 미매시스 혹은 표현(의 욕구)란 게 그 자체로 순수한 것은 아닌, 오랜 동안 세계의 합리성에 짓눌려 왔기 때문에 왜곡되고 기형화되고 상처받아 병들어 있는 ‘(자연성인 듯 여겨져 온) 자연성’이라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예술에서의 사회란 이렇듯 ‘재료’속에, 나의 ‘표현’ 욕구 속에 묻혀 들어 온 흔적들, 그 상처의 각인들 정도 말고 다른 무엇이 아닌 것이다. 정신분석적 회화들에, 나아가 예술 작품 일반에 작가 자신이 함께 산입되어야 했을 거라는 요청의 근거가 이것이다.
결국 이 지면에서 필자가 했을 거라는 요청의 근거가 이것이다.
비판, 혹은 비평을 수행한 건 아닌 셈이다. 그의 전시 도록을 다 보고나선 살짝 덮어 저만큼 밀쳐두고 나서, “근데요, ‘다른 그림’을 함 생각해 볼까요? 했던 셈이다. 생은 어떤 경우, 그 모순에 대한 치밀한 지적에 보다는 생 전체를 감싸는 유한한 생에 대한 따뜻하거나 건조한 연민에 의해 더 감동스러울 때가 있기도 했던 때문이다. 혹은 ‘파편들’을 다 모은다고 해서(다 모아질 수도 없거니와), 더 잘 설명된다는 법도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샛별의 이번 전시적 <진공지대>연작들, <풍경의 뒤> 연작들이 만들어 낸 의미 있는 성과들이 기억돼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