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샛별

“빽빽한 숲은 공간을 교란하며 길게 목을 빼 죽음과 뒤엉킨다. / 바람도 멈춘 창백한 구역. / 오래된 풀들이 베어나간 자리에 더 짙은 녹음이 빛을 발하면 /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소리 없이 탄식한다. / 숲은 힘없이 굳건한 자기 이미지를 무너뜨린다. / 훼손당한 녹색 / 볼 수 없는 눈 / 무언가를 추가해 되돌아오는 짙은 풍경.”

생명과 안식과 쉼으로 대표되는 녹색은 가장 자연스러운 색, 자연을 닮고 모방한 색, 자연과 동일시되는 색이다. 오늘날 녹색이 인간에게 쾌적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것이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문명 속에 포섭된 자연, 곧 문명화된 자연이기 때문이다. <녹색 에코> 전은 자본이 제공하는 나무, 숲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설정하고 이 인공화원에서 시대의 자화상을 구현하려는 구상이다. 녹색은 우리가 태어나 맞부딪힌 운명의 세계처럼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 우리 삶에 피부처럼 들러붙은 가장 자연스러운 자본시스템을 은유하며 유토피아적 이미지와 이상화된 삶을 대리한다.

이런 녹색이 에코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소리일까? 에코는 메아리로 단순 반복의 울림이다. 하지만 에코가 말하는 자의 입에서 떠나 공기를 휘게 하고 무언가에 부딪혀 다시 발화자에게 돌아오는 변형된 소리라면 어떨까? 포착되지 않던 수많은 것들과 합쳐진 소리이며 왜곡되고 더럽혀진 전혀 다른 소리라면? 들을만한 소리로만 구성되길 원하는 우리 삶의 하울링이라면? 증폭되어 되돌아오는 불쾌한 하울링이 음향시스템에 구성적인 것처럼 삶에서 우리가 제거한 것들의 이야기는 우리 삶에 구성적일 것이다.

녹색이 자연을 넘어서는 시점의 풍경,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서는 질적 도약의 시점인 특이점처럼 가장 자연스러운 스펙터클인 ‘녹색 자연’이 ‘자연’을 초월하는 지점의 풍경을 상상해본다. 눈앞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숲에서 그 붕괴를 암시하는 흐느적거리는 현상을 목도하는 것, 그럴듯하게 봉합한 현실의 풍경이 균열하는 이런 순간에 대한 관찰은 전혀 다른 논리의 다양성이 넘실거리는 세계에 대한 발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