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 덩어리인지 혹은 윤곽을 가진 형상인지, 여러 크기의 캔버스 표면 위로 흘러내릴 것만 같은 정체모를 녹색의 이미지가 어두컴컴한 전시장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샛별의 개인전 《녹색 에코 Green Echo》(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2017)에 대한 첫인상은 아무래도 내 기억에 그렇게 각인됐다. 하지만 잘 짜인 전시장 동선을 따라 캔버스와 마주 서서 그 표면을 꼼꼼히 살피다보면, 오래지 않아 녹색(톤)으로 위장된 현실의 진부한 장면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전시 제목과 동명의 작품 <녹색 에코 1~3>(2017) 연작만을 추려서 다시 보면, 아무렇게나 자라버린 녹색 숲의 풍경들 사이로 녹색에 물든 채 부유하는 평범한 사람들과 익숙한 일상의 장소들이 시선에 포착된다. 동시에 완전한 형태를 상상하는 것조차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녹색과 뒤엉켜 있는 그 유령 같은 존재들은, 어쩌면 애초부터 그렇게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진공과도 같은 비현실적인 녹색의 대기 속에 붙박혀 있다.

한편, 전시 공간을 비스듬히 경계 짓는 방식으로 설치된 영상 <인간적인 혹은 오염된 시간-블루>(2017)에서는, 공간의 위계가 거의 지워져버린 파란 방 안에서 비현실적 행위를 지루하게 반복하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둘은, 이중적인 말장난처럼 파랑으로 충만한 텅 빈 방 안에서 끊임없이 공간의 끝(한계)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다. 어쩌면 그 쓸모없는 행위의 반복은 이미 파랑에 갇힌 익명의 몸들이, 그 유령 같은 공간에서 벗어날 출구를 잃고-어쩌면 더 이상 찾을 시도도 하지 않고- 끝도 없는 무의미를 생산하고 있는 것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이샛별이 제시하는 초록 혹은 파랑으로 물든 진공의 세계는, 어떤 추상적인 완벽함의 기원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신화적 상상을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가늠케 한다.

이처럼 이샛별이 그린 “녹색 에코”는 실체화 할 수 없는 것, 이를테면 빛의 잔상이며 말 없는 진동에 불과하다. 그가 참조한 맥락들을 살펴보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님페인 “에코(Echo)”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단편 소설 속 “굽은 거울”이 그 정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결국 이샛별의 표현대로, “신체 없이 떠도는 목소리”와 자기 안에 갇혀 버린 “절대적 폐쇄”의 구조는 끊임없이 실패로 되풀이 되는 욕망의 비극을 닮았다. 그런 의미에서 <녹색 에코> 연작은 영원히 다른 사람의 말을 반복해야 하는 또는 굽은 청동 거울에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쾌락에 빠져 있는, 끝없는 주체의 분열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때 어디에도 없는 주체의 공백은 괴물처럼 무성해진 녹색 풍경처럼 결핍을 위장하는 익숙한 것들로 채워지게 마련이다.

그가 쓴 작가 노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녹색이 메아리로 되돌아온다면 그것은 어떤 색이며 형태이며 소리일까?” 이샛별은 청동거울에 비친 환영처럼 과도하게 변형된 이상(理想)과 욕망이 주인 없는 메아리가 되어 줄곧 현실의 허공을 맴돌고 있는, 이 빈곤한 시절의 풍경에 다가간다. 결국 녹색 에코는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지워진 과도한 현실의 풍경을 드러내며, 녹색으로 봉인된 현실의 이면은 사실 매우 가깝게 보여 지고 있지만 수수께끼처럼 철저하게 은폐된 존재로 시선의 통제에서 번번이 빠져나간다. 요컨대, 《녹색 에코》는 녹색의 메아리라는 이중으로 차단된 시각의 분열 상태에서 주체가 일으키는 강박적인 쾌락과 결코 끝나지 않는 종말의 시공에서 모두가 겪을만한 끝없는 자기 소외의 비극을 동시에 암시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적당한 크기의 캔버스 위에서 마구 뒤엉켜 있는 녹색의 물감 덩어리들과 희미한 형태들 간의 미묘한 결합과 견제로 느리게 구체화된다.

이샛별은 지난 두개의 전시 《인터페이스 풍경》(자하미술관, 2014)과 《녹색 파국》(아리랑갤러리, 2013)에서도 비슷한 사유를 끌어냈다. 특히 세로의 길이가 4미터가 넘는 큰 그림으로 전시 제목과 동명인 <인터페이스 풍경>(2014)의 경우, 시각적으로 통제할 수 없이 탈색된 거대한 풍경 앞에서 우리는 순간 시력을 상실한 것처럼 도무지 알아채기 힘든 현실의 바깥 세계와 대면해야 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래, 차라리 시력을 잃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어쩌면 이 큰 그림 앞에서 똑바로 서지도 못한 채 가는 붓을 든 웅크린 손으로 하염없이 현실의 세계를 모방하고 있었을지 모를 작가의 뒷모습을 떠올려 보자. 그 강박적인 장면을. 형태와 배경, 안과 밖, 중심과 주변, 현실과 비현실 등이 서로 간의 경계를 잃고 탈중심화된 이 그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쩌면 그것뿐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엇을 보았는가 보다는 무엇을 보지 못했는가에 대한 주체의 시각적 분열에 대한 물음이다. 이때,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마치 감각의 과잉 상태처럼 과도하게 드러난 현실의 비현실적 장면들이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작가의 반복적 행위로 구축한 현실의 실패한 풍경은, 결국 볼 수 없음이라는 시각적 비극의 표상이다.

때문에 <인터페이스 풍경>은 거대한 크기와 정교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가짜 그림처럼 공허하다. 가짜 그림, 그 말은 우스운 동어반복처럼 들릴지 모르나 말끔하게 펼쳐놓은 큰 그림의 존재감은 역설적이게도 아무 실체 없는 유령과도 같다. 이렇듯 이샛별은, 그가 회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현실의 풍경이 지닌 사실들에 주목하기 보다는 도리어 현실의 불확실성과 접근 불가능성에 맹렬히 다가간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그의 책 『행간 Stanze』(1977)의 서문에서, “욕망이 욕망의 대상을 부인하는 동시에 인정하는 지대” 혹은 “절대로 소유할 수 없고 즐길 수도 없는 무엇과의 관계 속으로 돌입하는 지대”에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한 행간의 위치야 말로, 이샛별의 회화가 놓일만한 임의의 자리가 될 수도 있겠다. 다시, 아감벤의 말을 빌려 보자면, (현실에서) 나태의 욕망에 빠진 어떤 이들이 “대상으로부터의 도주일 뿐 아니라 대상을 향한 도주”를 감행하며 “부정과 결핍의 언어로만 욕망의 대상과 소통”한다는 설명이 유령과도 같은 이샛별의 회화를 좀 더 납득할만한 것으로 몰고 가지 않겠는가 말이다.

2013년에 있었던 개인전 《녹색 파국》에서는, 유령처럼 현실의 파국을 폭로하는 우울하고 나태한 인간의 초상이 강조됐다. 최근의 작업들이 현실의 행간을 차지하고 있는 우울한 주체들이 유령 같은 상상을 통해 현실의 불가능한 장면에 다가가는 시도라면, 이전의 작업에서는 비현실의 자리에 서서 붙잡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사유를 꾀하는 유령들의 출현이 매우 잦았다. 파국에 처한 현실에서 가면을 뒤집어쓰고 자기 안의 편집증적 망상 속으로 깊이 빠져버린 인간의 초상은, 아감벤이 프로이트를 인용해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이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스스로의 유령을 즐기기”와 시각적으로 긴밀하게 중첩된다. 이는 “부정적인 것과 죽음을 소유화하면서 최대한 비현실을 움켜쥐고 최대한의 현실을 구축하고자 하는 인간 문화의 끊이지 않는 연금술적인 노고”라 아감벤은 말했다.

이 대목에서, 《녹색 파국》에 전시되었던 작업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일종의 허상처럼 왜곡되고 은폐된 형상들은 이미 붕괴된 현실의 공간과 자유롭게 접촉하면서 마술적인 현실의 서사를 꿈꾼다. 이는 그가 <인터페이스의 풍경>을 시공간의 맥락을 넘나들며 거의 자동기술적으로 이미지를 구축했던 것과 같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불가능한 세계를 무모하게 모방하려드는 유령들의 출현을 예고한다. 욕망의 대상과 소통하는, 우울에 빠진 나태한 인간, 유령 말이다. <원경-비극>(2012)으로 이름 붙인 그림 하나를 놓고 보자. 토끼 가면을 쓴 인물은 작가의 정체성이 투사된 캐릭터다. 화면에 바짝 밀착된 이 형상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시선을 가면 뒤로 감추고 손으로 턱을 괸 채 깊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선은 토끼 가면에서 검은 눈동자 부분을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게 뚫어 놓은 구멍 탓에 더욱 공허하다. 현실의 풍경들을 뒤로 하고 녹색 대기에 둘러싸인 이 인물은, 망상 속에서 스스로의 유령을 즐기는 듯 현실로부터 어느 정도 후퇴해 있다. 불완전한 현실에 대한 증명은, 아감벤이 말한 “현실로부터의 회항”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쩌면, 현실 증명을 실패함으로써 그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샛별은 줄곧 “절대로 소유할 수 없고 즐길 수도 없는 무엇과의 관계 속으로 돌입하는 지대”에서 회화를 탐구해 온 셈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과도한 현실의 풍경들과 유령들이 배회하는 비현실적 공간을 통해 현실을 우회적으로 증명해온 작업들 외에, 강박적인 연필 드로잉을 보여준 전시 《가장 욕망하는 드로잉》(갤러리담, 2016)도 있었다. 무언가를 강렬하게 욕망하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앞에서 잠깐 인용했던 아감벤의 표현대로, “부정과 결핍의 언어”로 “욕망의 대상과 소통”하려는 주체의 불완전한 시도를 연상시킨다. 그는 무모해 보일 정도로 가학적이고 반복적인 그리기 행위를 통해, 현실의 부재, 즉 현실의 불완전함과 접근 불가능성에 다시 다가갔다.

그림을 보면, 대체로 원뿔을 뒤집어 쓴 채 시각의 피라미드에 갇혀 결국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인물의 형상과 토끼 가면의 검은 구멍처럼 눈동자가 깊이 파인 인물의 형상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그 형상들은 흰 종이 위에서 손 그림인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수열적이고 기계적인 반복에 따라 교차되고 재배치되면서, 의미 없는 기하학적 구조로 번식하듯 폭발적인 연쇄를 일으키고 있다. 이때 이샛별은 그림 그리기의 행위를 통해, 실제적인 주체의 소외와 강박적 분열을 시각화 한다. 어쩌면 이 그림 그리는 행위야 말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실패한 현실의 빈곤함을 증명하기에 가장 적당한 예가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오래 전부터 그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욕망해 왔다. <위장-보호색>(2001)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는 벚꽃이 만개한 사진 한 장을 잡지에서 뜯어 그 풍경 안에 잠재되어 있는 불완전한 존재의 이미지를 포착했다.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인 이 이미지들은 사실 존재라고 할 수도 없고 비존재라 할 수도 없는 현실의 애매한 경계, 그 행간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들로 볼 때, 이샛별은 망상에 사로잡히듯 일관되게 시각의 욕망에 대한 사유에 진지하게 몰두해 들어가면서 현실과 구별되는 이미지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을 시도해 왔음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