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의 회화가 거주하는 세계는 보편적으로 사각이다. 사각은 신화의 세계이다.

논증적인 사유 이전의 문명이었던 고대 이집트가 오늘날까지 남겨 놓은 자신의 이미지인 피라미드는 바로 이 신화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사각 프레임의 날선 단면들은 신화적 상상력이 가진 칼날이기도 하다. 상상력은 전혀 상반된 양면을 지닌다. 가령 신화 속의 생물인 용이 파충류와 조류 그리고 포유류와 어류의 종합이라 한다면, 그리하여 용을 긍정적 상상력의 산물이라 한다면, 바로 이 종합 이전에 제멋대로 모든 생물들의 각을 뜨는 부정적 상상력이 있었다. 이 부정적 상상력의 이름은 다름 아닌 광기이다. 회화는 이 밑도 끝도 없는 광기로부터,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또 그것을 부여잡고 기적적으로 세계를 펼쳐내는 주체의 마력을 상연한다.

‘아래로부터의 봄’이라는 주제를 가진 이샛별의 그림들은 근원적으로 이러한 프레임에 관한 사유를 깔고 있다. 도려지고 각이진 세계는 원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자연과 대비되며, 어떤 인과율의 구속으로부터도 해방된 절대자유의 세계이다. 존재자가 자신을 존재로서 주장하는 세계, 자연법칙의 연쇄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질서를 구상하는 세계, 자연의 이물로서의 제2의 자연이다. 그러므로 ‘아래로부터 본다’는 것은 무의미한 다양들이 해체되어 재구성되는 과정을 시각화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아래는 상징적 현실에 의해 억압된 것이 머무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거나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물들의 세계이다. 그것들이 표면으로 떠오르기 위해서는 프로이트의 용어로는 응축과 전치, 라캉의 용어로는 은유와 환유라는 가면으로 위장해야 한다. 그것들은 현실적인 세계에서 자신들의 이름이나 얼굴을 획득하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샛별의 그림들은 이 얼굴 없는 것들에 얼굴을 부여하는 행위일 것이다. 하지만 볼 수 없으며 보아서도 안 되는 사물들에 얼굴을 부여하는 행위가 반드시 광기를 길들이고 참을 수 없는 것들을 보아줄만한 것으로 순화하는 것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녀의 그림은 우리가 가진 확고한 현실의 형상들을 스멀스멀 근원으로부터 잠식하는 공포를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코끼리 인간>으로 다뤄진 실제 인물인 코끼리인간 조셉 메릭(1862-1889)의 이야기는 그 공포의 일단을 밝혀준다. 그의 얼굴은 두 살 때부터 앓기 시작한 질병으로 거대한 부종으로 뒤덮이기 시작하여 인간적인 얼굴성을 식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형태 없는’ 얼굴을 대면한 사람들은 그 인간의 얼굴이 없는 인간에게 강한 혐오와 공포를 느끼는 동시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서커스단에 구경거리로 고용되었으며, 사회자는 그의 얼굴의 기원에 대해 그럴듯한 해설을 덧붙였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하던 중 관람한 서커스 공연에서 성난 코끼리가 그녀를 쓰러뜨려 코끼리 밑에 깔리게 되었다고. 슬라보예 지젝은 코끼리와의 성교를 은밀하게 암시하는 이 발언을 토대로 ‘밑으로부터의 봄’(view from below)이라는 개념을 고안한다(슬라보예 지젝,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196). 아래로부터 코끼리를 본다면 어떨까? 그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남근의 형상이다. 그녀의 끔찍한 쾌락, 곧 주이상스가 아들의 얼굴에 새겨진 것이다. 언어화될 수 없는 응시의 인장을 받은 코끼리인간의 얼굴은 형태를 갖지 못하고 흘러내린다. 그렇다면 코끼리 인간이 주는 공포와 매혹이라는 양가성은 그 끔찍한 쾌락의 흔적이 아닐까? 공포와 매혹은 금지 이전의 세계, 곧 무정형의 밤에 대한 노스텔지어와 금지 이후의 안정적인 세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동시에 드러내는 정서이다.

이샛별의 얼굴들은 밑도 끝도 없는 감상적인 자아 탐구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의 그림들은 아래와 위,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관계의 구조를 집요하게 추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굴을 오브제로 삼은 것은 용의주도한 선택이다. 인간의 신체를 기표들의 지도라 할 때 이 지도의 등고선은 신체에 뚫린 구멍을 중심으로 조밀한 등고선을 그린다. 말할 것도 없이 등고선은 항문과 성기 주위, 그리고 얼굴을 중심으로 복잡하게 전개된다. 항문과 성기가 외설적인 ‘아래’ 그 자체라면, 얼굴은 그 아래가 표면화되는 장소, 무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 무의식이 의식화 된 장소, 그럼에도 그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양가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봄’이라는 기획을 선언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은 물론 <상연>이다. 무대라는 가상은 전면화 되고, 무대를 바라보는 현실의 관객은 이면화 된다. 거울이미지를 비틀고 있는 이 그림에서 앞모습을 드러내며 그림 전체를 압도하는 무대 위의 인물은 무대 아래 인물의 뒷모습을 통해 투사된 이미지처럼 보인다. 아래의 표면화, 이면의 전면화이다. 이상적 자아를 암시하는 사물들에 둘러싸인 무대 위의 인물은 강력한 힘의 소유자처럼 보이지만, 매우 어설프게 조립되어 만일 그 힘이 사용된다면 터무니없이 분해될 것만 같다. 이 그림은 일종의 자화상이지만, 정확히 말한다면 타자들의 욕망으로 조립된 자아상이다. 그녀의 자화상에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구조는 기획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얼굴 그림들에서도 반복된다. 그녀의 얼굴은 인물화도 초상화도 아니다. 각각의 그림들은 모두 다른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인물들은 모두 동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그림들은 인물에 대한 추상인 한편, 이 추상들이 현실의 인물을 바탕으로 표현되고 있으므로 ‘구체적 추상’이다. 우리는 이 구체적으로 추상된 인물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기표가 탄생하여 이러저러한 계열을 이루다가는 다시 흩어져 사라지는 일종의 흐름을 관찰한다. 이샛별의 인물들이 거의 부피를 갖지 못하고, 기껏해야 싸구려 플라스틱 가면이 주는 정도에 그치는 것은, 이 인물들이 기표들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도에는 분명한 단락이 있다. 이 그림들이 감상자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유도 이 단락이 내포하는 가혹한 의미 때문이다.

단락은 눈, 아니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멍에 있다. 이 구멍은 낭만적인 사랑에 빠진 만화 주인공들의 눈동자에 그려진 별빛으로 살짝 가려져 있지만, 바로 이러한 치장이 그 허무의 암흑을 더욱 끔찍한 것으로 만든다. 만일 우리의 시선이 이 구멍 속으로 빠지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이쪽에서는 피 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서는 또 다른 하얀 환영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사라지는” 무시무시한 ‘세계의 밤’을 목격하게 된다. 그 밤의 암흑 속에 우리 자신의 근원적인 허무와 죽음이 크게 쓰여 있다. 이 밤의 빛깔은 얼마나 짙은지 심지어 인물들의 표면으로 배어나오기도 한다. 이 ‘세계의 밤’, 광기와 죽음충동으로부터, 그것들을 부여잡고 펼쳐진 기표들의 지도가 이샛별의 얼굴들이다.

눈들을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한 인물화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현실은 두 단계의 폐지를 거쳐 구성된다. 첫째는 자연의 폐지로서의 세계의 밤이며, 둘째는 밤의 폐지로서 모든 사물들이 기표의 연쇄 속에서 고유한 의미를 획득하는 상징적 세계로의 진입이다. 그러나 상징계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모든 상징계는 그것들을 순식간에 붕괴시킬 수 있는 구멍, 밤의 통로가 있는데 이 구멍을 가리는 것이 바로 라캉의 욕망의 ‘대상 a’이다. 대상 a는 부재의 기표로서 불가능한 대상이다. 이는 환상이라는 무대 위에 찬란하게 핀 매혹적인 꽃이다. 그러므로 꽃은 시선 밖에 있지 않고 환상에 사로잡힌 시선의 발생지, 바로 인물의 눈에 있다.

이 오브제의 부분들이 흔들리는 이유는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부유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대상들의 실제 이미지, 우리가 상상-상징적 동일시에서 말끔하게 제거하는 대상의 응시, 대상에 새겨진 타자의 응시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샛별의 그림은 외설적이다. 그녀의 인물들은 감히(猥) 말 밖에 있어야 할 말(外說)을 끌어들여 의미의 세계를 더럽힌다(褻). 부분적으로 흔들리는 대상 그 자체의 이미지는 우리의 시선 밖에 있어야 할 것들이기도 하였다. 그림들은 우리의 상상-상징적 자기 이미지를 욕보인다.

환상의 대상들은 우리를 매혹하여 욕망하게 하지만, 뒤집어보면 대상들은 우리를 욕망한다. 우리는 대상의 대상이 되며, 주체는 사라지고 대상의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로 전락한다. 인물이 꽃이나 무대와 병치되는 두 편의 삼부작에서 인물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단지 주체의 가면을 썼을 뿐 대상들의 일부로 전락한 인물들은 선명하게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세계로부터도 단절되어 있다. 병사의 형상을 띤 살덩어리 그림들은 이러한 주제를 급진화 한다. 오브제들의 배경은 완전히 삭제되어 있으며, 대상 그 자체로서 살덩어리들은 대상들과 조금의 간극도 없이 융해 통합되어 있다. 대상과 간극이 없는 주체가 병사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설정은 충격적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들은 하나의 생체발전소로서 커대한 컴퓨터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 영화의 빼어난 설정은 이 생체발전소들이 컴퓨터 시스템이 제공하는 가상현실의 환상에 완전히 포획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제 ‘아래로부터 봄’이라는 이샛별의 기획이 당대와 맺는 예술적 발언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자본주의적 전체주의를 지칭하는 그럴듯한 이름이 아닌가? 전 세계를 전체주의적으로 장악한 후기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환상에 폐쇄되어 세계와 무관한 듯 살아간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상품들은 욕구, 곧 세계 내 존재의 삶에 소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 곧 환상을 지지하고 장식하는 소품들로서 소비된다. 전선은 지구적인 차원에서 퇴조하여, 다양한 정체성의 수준들로 분산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전선은 각각의 개인들의 내면으로 후퇴하고 말 것이다. 마치 인간은 근원적으로 개인일 뿐이라는 듯이. 이샛별의 아래와 표면, 이면과 전면,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구조에 대한 탐색은 인간 주체가 대상으로 전락하여 환상적인 내면으로 후퇴하는 상황 속에서 중지 혹은 단절의 지점을 찾는 실천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로부터 봄’은 묵시록과 같은 장면을 재현한 종교화의 일종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혹독하고 끔찍한 이미지 앞에 선다. 그녀의 그림을 보는 고통은 절망 그 자체를 즐기는 냉소주의로 끝나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