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는 울림이다. 에코는 반사 따위의 작용으로 충분한 진폭과 명확한 지연 시간을 갖고 되돌아오는 파이다.

누군가의 행위에 의해서만 발생하며 무언가에 부딪혀 발화한 자에게 되돌아온다. 발화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울림 또한 없다. 에코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소리이다. 그렇다면 에코는 비주체적 소리일까? 단순히 발화자의 말만을 희미하게 반복하는 소외된 울림일까?

신의 노여움을 사 남의 끝말만을 되풀이하는 형벌을 받고 나르키소스를 사랑하다 목소리만 남은 그리스 신화 속 숲의 요정 에코는 신체 없이 떠도는 목소리이다. 요정 에코가 자신의 그림자에 매료되어 영원히 자기라는 감옥에 갇힌 남자를 사랑하다가 신체를 잃게 되었다는 설정은 절묘하다. 나르키소스는 자신과 사랑에 빠졌으므로 남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에코는 절망 속에서 자기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생물학적 육체를 잃고 영원히 떠도는 목소리로 남게 되었다.

에코를 메아리로만 보면 그저 되돌아오는 단순 반복의 울림일 뿐이다. 하지만 말하는 자의 입에서 떠나 공기를 휘게 하고 무언가에 부딪혀 다시 발화자에게 돌아오는 변형된 소리라고 한다면 어떨까? 반향에 의해 다른 주파수를 가지고 회귀하는 창조된 소리라고 한다면? 남의 말을 영원히 따라 하는 소리가 발화자의 목소리를 침범해 오염시키며 스스로 해명되지 못한 소리를 되돌려주는 요정 에코의 유일한 주체적 행위라면? 발화한 공간에서 우리 눈과 귀에 포착되지 않는 수많은 것들과 합쳐진 소리, 즉 주체가 내뱉은 것에 무언가 더해진 왜곡되고 더럽혀진 전혀 다른 소리, 더 이상 출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환된 소리라면? 몫 없이 사라진 자들의 목소리를 돌려주는 울림이며 사건 후의 증상으로 본다면? 들을만한 소리로만 구성되길 원하는 우리 삶의 하울링이라면? 여기에 공간 자체가 우리가 내뱉는 소리의 특정 주파수를 증폭하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면 어떨까? 의미가 명확한 완전한 소리에서 불필요하게 계속 추가되는 소리, 입출력이 있는 시스템에서 출력 때문에 입력을 변화시키는 소리인 하울링은 피드백이다. 내보낸 것이 다시 돌아올 때 원음에 무언가 추가되어 왜곡된 것이 입력되고 그것이 출력되는 상황의 무한 반복 루프.

변형되어 귀환하는 에코에 녹색을 더한다. 가장 자연적인 색이라 일컫는 녹색은 과거에 자연을 흉내 낸 색으로 불경하게 취급되었으나 이 시대의 녹색은 자연을 넘어 이상화된 삶을 대변한다. 녹색은 이미 트렌드와 대안이 되어 버린 지 오래고 점점 더 강력한 자본을 요구하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대가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은 그냥 고여 있는 것이 아니다. 에코를 갖고 있으며 나에게 되울릴 것이고 다시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영원히 변질시키는 피드백을 무한반복 할 것이다.

녹색의 에코란 무엇일까? 녹색이 메아리로 되돌아온다면 그것은 어떤 색이며 형태이며 소리일까? 죽었어도 자기 죽음을 알지 못하고 끝없이 무덤에서 살아나는 좀비처럼 푸르고 싱싱한 녹색은 다른 어떤 것을 계속 추가해가며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우리 눈앞에 드러나고 있다. 녹색의 얇디얇은 살갗을 살짝 들추면 거기에는 곪아터진 살과 피와 끈끈한 액체와 너덜대는 근육이 뒤엉킨 시뻘건 죽음의 덩어리가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적응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세계에서 근본적인 것은 절대 바꾸지 않으면서 그저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우리의 지독한 관성에 진정한 욕망의 에코를, 녹색이 녹색으로 존재하기 위해 제거한 것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전시는 우리에게 에코로 되돌아오는 녹색, 녹색 하울링을 만들어내는 텅 빈 사람들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증폭되어 되돌아오는 불쾌한 하울링이 음향시스템에 구성적인 것처럼 삶에서 우리가 제거한 것들의 이야기는 우리 삶에 구성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가리고 숨기고 아니라고 거짓을 말해도 그것들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보지 않으려고 억압한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끝끝내 당신의 삶 속으로 되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