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가면과 트레이닝복 차림의 인물, 흘러내리는 살덩이, 새떼와 날아다니는 사람, 사건의 연속 혹은 단절성, 그것은 어떤 코드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충분히, 혹은 너무 충분히 서술되고 있는 듯 보이는 화면에 ‘서술되지 않은’ 것? 미처 포함시키지 못한 빠져나간 이야기, 제거된 이야기 때문에 서술되지 못한 무엇이 있는 것인가?_이샛별
1. 사각 원-불가능한 봄
이샛별의 작품은 좋다. 붓질, 드로잉의 흘리기, 대범한 스케일과 구성이 좋으며 무엇보다 색감으로 장악해 오는 감각적 매력이 뛰어나다. 왕창 다가오는 감각적인 매력과 군데군데 묻어나는 위트와 환타지는 매력을 발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미궁으로 인도하는 문턱이 된다. 문턱을 넘어가 보자. 이번 전시의 제목(unnarrated)에서 보듯이 이샛별의 작품은 ‘아직’ 이야기하지 못한 것을 제시하려 한다. 그러나 ‘un-narrated’, 서술되지 않은 것은 그의 작품을 모두 감상하고서도 여전히 찾아낼 수 없다. 의미의 적중은 고사하고 우리는 ‘아직 서술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서술되지 않은 것’ 앞에서 우리는 머뭇거리며 종결되지 않는 소통의 채널에 매달려 있게 된다. ‘이게 뭐지?’ ‘작가는 왜..?’ 작품 앞에서의 질문은 곧 참조물, 작가의 의중을 탐구하게 하지만, 이 지점에 원하는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면에 묶어두는 이러한 질문들이야말로 이샛별 작품의 강력한 매력이다. 작품, 관객, 작가 모두 질문에 회부되지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이 소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순순히 이샛별의 작품을 마주할 때 인상은 마치 ‘최후의 심판’과도 같은 장엄한 맛이 풍긴다. 당연히 고전 작품에서 보이는 ‘최후의 심판’이나 ‘장엄’과는 다르지만, 매우 드넓게 조성된 조형공간과 그 안을 가득 메우는 다양한 종류의 형상들, 이 형상들의 심상치 않은 몸짓이나 수많은 단편들이 모여 고전 못지않은 장엄함을 자아낸다. 마치 물병에서 점점 풍성하게 퍼지는 꽃다발처럼, 자아에 대한 고집스러운 해명은 결국 화려한 수사로 만개하게 된다는 멋진 말을 라깡은 남긴 바 있다. 이샛별 작가의 작품은 이런 화려한 수사가 만개하면서도 다 하지 못한 자기 해명의 빈 틈(구멍)을 평면에 구조화함으로써 ‘말함과 말못함/ 서술하고자 함과 [그럼에도] 서술되지 않음/ 가능과 불가능/ 만개와 빈 구멍’ 사이의 반전이 주는 이상한 거리감을 현대식 장엄함으로 전치하고 있다. 기이한 추리닝맨과 사실적인 이미지들, 복잡한 장면의 틈 사이로 흐르는 살덩어리들과 고착된 형상들. 익숙하지만 살짝 낯설고 어긋나는 형상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그 현장에는 없는 ‘다른 장면’을 생각하게 되고 작품은 결국 그에 대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작품 앞에서 우리는 과잉 속 결여, 즉 스핑크스 앞에 선 오이디푸스가 되는 것이다. 여기 작품 앞에 우리 오이디푸스들을 묶어두는 매력의 핵심은 만개한 꽃(작품)에 질문이 이어지도록 만드는 장치(apparatus), 즉 추리닝맨의 제스처이다. 꽃으로 눈 먼 추리닝맨(<휘어진 자>), 태엽있는 추리닝맨(<창세기>), 변형된 토끼 추리닝맨(<라스트맨1>), 3인조 추리닝맨(<보충물>) 등. 이 제스처는 해석의 연속과 단절에, 일관성있는 조형질서의 연속과 단절에 관여하면서 관객에게 어떤 해명을 강요한다. 이러한 작풍은 초현실주의의 전통적인 수법이다. 달리(Dali, S)는 <시뮬라크럼(simulacrum)>(1938)에서 아주 익숙해 보이는 풍경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풍경인지 알고자 하는 순간부터 관람자는 완전히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시뮬라크럼>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어느 것에도 적중되지 않는 끈 떨어진 이미지, 시물라크라이기 때문에 의식은 의미 있는 단위로 그것을 읽어낼 수가 없다. 지성은 그것을 분류할 능력이 없으며, 상상력은 그것에 대한 어떠한 종합도 불가능하다. 막다른 골목으로 유도하는 이러한 기법을 달리는 ‘편집증적인 비평기법’이라 말한 바 있다. 살바도르 달리가 제시하려는 이러한 불가능성은 바로 ‘다른 장면’ 즉 무의식의 제시이며 이것이 ‘초현실’이다. 이샛별의 작품에도 이중노출처럼 흔들리는 이미지가 등장하거나(<라스트맨2>) 서사가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들의 우연적인 조합(<클라인의 항아리>, ? ?<휘어진 자> 등등)이 주된 수법이다. 작품제작의 기법이나 이념면에서 초현실주의의 계보(다다, 네오다다와 그 이후 오늘날까지)와 80년대 형상미술을 잇고 있으나, 이샛별의 작품은 훨씬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예를 들어, 작가가 화면에 소환하는 이미지들은 주로 인터넷 서핑을 통해 수집되고(<라스트맨1,2>의 배경은 작가가 직접 촬영한 장소이다.), 애초에 이 이미지를 부르게 된 문자(제목)를 무수히 참조하면서 수집물을 화면 위에 배치한다. 즉 자신의 일상에서/공부에서 지각에 걸려 뱅글거리는 단어로부터 시작하여 불려 나온 성운(星雲)이 하나의 작품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언젠가 자신에게 걸려 든 문자(예를 들어, ‘라스트맨’, ‘보충물’ 등등)에서 시작하여 이 문자로부터 비롯되는 이미지 연상과 수집 그리고 그것의 배치 혹은 구성으로 종결된다. 이 구성을 관람하는 관람자는 작가가 제시한 임의적인 흐름 속에 상존하는 ‘단절’, ‘절단’의 지점을 분명히 하면서 실패하는 소통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양방향의 벡터 속에서 그의 형상 작업은 르네 마그리트가 주장하는 이미지 실재를 넘어 그것에 무의식이라는 근거를 소환하려 하고 나아가 그 무의식이 현실의 허구성을 돌파하는 길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의 정교함은 바로 ‘지금 여기’의 현실과 무의식의 관계를 적시하며 현실의 허구성과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진실(the real), 이 둘의 불가피한 관계를 관찰하는데 있다. 이 점은 ‘현실이란 구성되는 것’이라는 입장에 대한 작가의 동의와 주장에서 잘 드러나 있다(작가노트 참조). 따라서 구성되는 현실처럼 그의 작품 역시 매끄러운 연결인 듯하면서도 늘 어긋나는 구성으로, 클라인의 병처럼 메우지 못하는 구멍을 언제나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서술되지 않은’ 구멍, 이것을 구조적으로 작품 속에 설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라깡은 이 빔(구멍)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해석)욕망의 변증법을 불가능한 ‘사각 원’으로 부른 바 있다.
2. ‘서술되지 않은’ 홀(hole)과 S₁
?따라서 화면 위에 제시된 이미지들은 작품제목의 영향권 내에서 상호연관성을 가지게 되지만 매끄러운 전체 이야기로 통합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서술되지 않은’ 작품들은 주요 도상을 통해 어떤 일관성을 지니는 것처럼 위장한다. 이것은 작품마다 등장하는 ‘추리닝맨(토끼 혹은 인간 얼굴)’, ‘살덩이’ 두 요소이다. 허공중에 날아다니는 비닐봉지처럼 우연적이고 소음처럼 무의미하지만 이 도상은 각 작품마다 고정적으로 출연함으로써 마치 어떤 중대한 의미가 반복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사실 탁월한 배치이다!). 그러나 정작 추리닝맨(토끼가면이든 아니든)은 작품 속에서 특정 제스처를 통해 작품에 대한 질문을 증폭시켜줄 뿐이다. 작품에서 추리닝맨은 ‘고정되거나 가정된 의미’를 함축하거나 지시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며 그냥 하나의 표식, 라벨 혹은 기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작품의 감각적인 매력과 일관성을 주도하는 매우 중요한 도상이면서 그 지위는 상징화 연쇄에서 이탈된 어쩌면 가장 이질적이며 우울한 화면의 잉여분을 자처하는 듯하다. 공중에 떠오르고, 토끼모습을 하고, 태협 자동인형으로, 살덩이를 쏟아내거나 3인조 개그맨 같은 위트와 재치로. 아마도 추리닝맨에 대해 무심하고 표피적인 인상에 고정되는 사람이 니체의 ‘라스트맨’이 아닐까 한다. 자아 밖의 일에 대해 귀찮아하는 자. 이 ‘밖’이 초월이자, 외부이자, 타자일 것인 바, 라스트맨은 단적으로 타자의 목소리에 대해 불감증에 걸린 자들. 그러나 라스트맨과 달리, 화면 속으로 유유자적 유영하는 인물을 뒤로하고 화면 밖으로 막 돌아선 추리닝맨(<라스트맨1,2>)은 언젠가 외부로부터 자신에게 기입된 문자 한 조각, 이 문자의 유래인 타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형상아닌가? 이것은 동요를 일으킬 뿐 구체적 대상으로 상상할 수 없으니(표상불가능성), 추리닝맨의 제스처는 그 목소리를 시각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시초에 기입된 문자인 타자의 목소리는 표상 불가능함을 환기시키면서 작품의 제목으로 그리고 다시 주요 도상인 추리닝맨을 통해 작품 속에 실현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작품 외부에 있는 제목과 주요 도상(추리닝맨과 살덩이)은 작품의 화면을 기이하게 주도하며 작품을 대표한다. 그리하여 이 도상은 작품의 제목과 그 연상의 연쇄물 속에서 대단히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모종의 반성적 거리를 지니는 것처럼 위장하고, 이러한 지위에서 문자와 기표의 절묘한 반향을 일으키며 도달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거리감’을 지시한다. 거기에 타자의 목소리가 누리는 어떤 향유가 있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느껴지는 ‘장대함’은 이 거리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타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작품이란 어떤 것인가?
잠시 다음의 제목을 소리 내어 읽어보자. <휘어진 자>, <라스트 맨>, <보충물>, <임의적 자유>, <창세기>,
<클라인의 항아리>, <서스펜스>. 이 목소리로부터 구성된 것이 그림 속 이미지들이니, 이런 맥락에서 이 목소리는 다른 이미지를 호명하는, 애초에 우리와 만났던, 그래서 향후 상실을 복구하려는 우리 욕망의 노선을 유도한 그 타자의 목소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목과 작품의 관계’는 우리 욕망을 승인했던 그 타자의 목소리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작품의 틀 내부에 한정하자면 추리닝맨의 제스처가 이 유비적 관계를 환기시켜 준다. 그렇다면 화면 배치의 근원에 놓여 있는 각각의 제목은 화면의 이미지들을 불러내는 일차적인 원인이자 출발점이므로 이를 라깡의 말로 S₁이라 부를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하나의 기표로 결정해 버리는 것. 그래서 이것은 억압이자 은유이며, 주인기표라고 불린다. 이것을 S₁이라고 부르게 된다면 이 발판(S₁)으로부터 호명된 화면 위의 이미지들은 S₂(다른 기표)가 되어 개개의 작품은 어떤 담화(discourse)가 되는 것이다. 제목, S₁은 타자의 승인을 통해 기입된 내 욕망의 대표주자로서 자아 해명에서 막다른 골목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이 S₁이 베일처럼 가리고 있는 것, 그것이야 말로 막다른 골목에 놓인 간극(구멍), 이것이 바로 거세 아닌가? 이로써 지금까지 기술한 ‘제목, 문자, 추리닝맨의 제스처, 타자의 목소리 그리고 향유’는 막다른 골목인 거세와 관련된다. 어째든 작품에 대한 기술은 이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 ‘서술되지 않은’ 그것은 S₁ 혹은 작품의 제목이라는 기표들로 베일에 가리기 때문에 동요만을 남긴 채 상상하기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목들‥‥‥, 이 S₁들은 왜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것인가? 타자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기 때문 아닐까? 멈추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는 추리닝맨의 제스처처럼 낯설고 기이한 방식으로 우리 현실에 침입한다. 침입으로 인한 기존의 의미, 상상계의 붕괴는 불안과 공포, 하나의 서스펜스를 실연하기도 한다.
3. 서스펜스, 이성의, 아니 초자아의 목소리와 문자
작품으로 돌아와 보자. 으스스하고, 뭔가 수상한 분위기는 ‘말할 줄 아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 우선적으로 그것을 무엇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물리적인 시공간을 떠나 잠시 우왕좌왕하며 수상하고 낯선 전조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무엇인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서스펜스 시리즈’는 이런 이상한 전조들을 화면에 담아낸다. 작품에서 수상하고 이상한 동요는 드로잉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조 기분의 초록색이 웅변해준다. 지금도 흘러내리는 것만 같은 물감 자국은 이 웅변을 조형적으로 강화해 준다. 안정적이지 않은 초록색이 화면을 온통 메우면서 그 위로 흐르는 물감은 지루하고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흘러내리면서 안정된 현실을 망칠 것만 같다. 뭐지? ‘지루하고 너무 긴 시간’은 의식의 주목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그것은 진행되고 있으며 변화시키고 그래서 의식을 깜짝 놀라게 한다. 흘러내리는 물감은 이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들을 지시해주는 듯하다. 그래서 이샛별은 서스펜스 드로잉을 영상물로 제작하여 작품 속의 기이한 움직임을 실제 촬영분을 통해 드러낸다. 화면 속 구석에 등장하는 아주 작은 인물이 진짜 인물이 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마치 소설 속 허구의 주인공이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나와 같은 인간으로 분해 말하고 움직일 때 느끼던 기이함과 비슷하다. 영상물에서 드로잉의 문자는 소리로 대체되어 ‘문자와 소리’는 같은 지위(position)로 공명한다. 이러한 기분을 프로이트는 ‘기이하고 낯선(Unheimlich)’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라깡의 불안으로 재해석되어 불안의 출처로서 ‘거세’와 연결되는 것이다. 거세와 관련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 혹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거세’는 하나의 막다른 골목이다. 그 너머는 거세 이후, 상징계의 여러 기표효과를 통해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타자의 목소리가 이 효과들을 제시하려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어떤 동요, 불안으로 감지하며 삶 속의 서스펜스로 경험하게 된다. 서스펜스 드로잉 연작과 이를 다시 한 번 다른 매체(영상)로 굴절시킨 ‘긴장감(서스펜스)’은 이렇게 ‘서술되지 않는’ 것의 징표들이다.
‘ADDRESSEE, Je na sais quoi, spot, La voix, Unnarrated, ex-sist, not-all, Was will das weib?’
이상의 단어들을 눈으로 구경하고, 그 다음 읽을 수 있다면 소리 내서 읽어보라. 이샛별은 서스펜스 드로잉 연작에서 위의 문자들을 작품 속에 등장시킨다. 의미를 안다면 작품의 내용이 풍성해지겠지만 그 의미를 모른다고 해서 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읽을 수 없다면 이 단어들은 그 자체로 어떤 문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말 속에서 이런 식으로 문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 문자는 의미가 구성되기 이전 타자의 지도 아래 좋고 싫음의 표식과 더불어 우리 몸에 기입된다. 이후 이 지점들은 자아의 핵을 구성하며 향유의 진원지가 된다. 그러니 ‘문자와 향유’는 불가피한 관련을 맺는 것이다. 이 지점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좋음과 만족의 자기 우물’이면서 동시에 상징화라는 거세에서 소외된 ‘몸의 진리’이자 무의식의 핵이다. 몸의 진리로서 무의식은 라깡의 말로 ‘성적 현실이자 충동이며 이것이 바로 실재(the real)’이다. 문자는 충동의 운명(vicissitude)을 따르기 때문에 상징화되기를 끊임없이 열망하며 기표로 대표되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타자의 목소리는 충동의 운명을 따르는 것이기에 ‘그치지 않고’ 울려 퍼지는 것은 아닌지. 칸트는 우리 경험에서 다룰 수 없는 고도한 추상물 즉, 이념을 다루는 우리의 능력을 이성에서 찾았고 그런 이성의 위대함에 경탄한다. 이성은 경험 너머의 것을, 그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제시해주는 능력이다. 이 이성의 강요, 그것은 경험불가능하고 표상 불가능한 것에 대한 제시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이성은 어떻게 그것을 알고 다룰 줄 아는 것일까? ‘그것’의 작용이 없다면 말이다. 라깡은 ‘그것의 작용’을 충동의 운명에서 찾고, 충동은 타자와의 기원적인 만남에서 남은 흔적을 배꼽으로 삼아 뫼비우스 띠와 같은 경로로 운행한다. 그렇다면 충동의 운명은 상징화된 합리적 세계와 문명 속에서 중얼대는 불만의 목소리이자, 합리적인 법이 제거한 그 이면의 목소리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자아인바, 법 이면에서 양보하지 않고 혹독하게 명령하는 목소리의 주인이다. 라깡은 이를 ‘초자아는 향유의 정언명령’이라는 어려운 말로 표현했는데, 이는 ‘즐기고 즐기고 또 즐기라!!’는 가혹한 즐김의 명령이고, 이 명령을 수행하는 우리는 ‘고통 속의 쾌락’으로 향유를 즐기게 된다. 이샛별 작가의 작품에서 울려 퍼지는 타자의 목소리를 찾다보니 ‘칸트’라는 이름까지 빌렸지만 그의 작품들은 분명 이 타자의 목소리, 초자아의 목소리 그리고 거기 어딘가에 놓이는 향유의 진동으로 읽어볼 수 있다. 거세를 상징적인 법(기표)으로 대체하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 나머지들의 운명과 몸의 진리는 작품 속 문자나 영상의 소리의 울림 속에서, 기이하고 수상한 풍경(인조 녹색과 물감 흘리기), 무의미한(의미결정이 ‘아직’ 곤란한) 이미지 배치, 더미(dommy)와 같은 도상(추리닝맨과 살덩이)들 사이 사이에서 진동하며 우리에게 미술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작품 속에 근본적인 질문을 설치한 작가는 화면·사각 틀 안에 감각적인 표면을 멋지게 구사하며 근본적인 ‘빔(empty)’의 의미를 묻고 미술/예술/분석의 깊이를 점점 더해간다. 앞으로 작가로부터 어떤 즐거운 변이들이 탄생할지 설레고 기대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