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몇 점의 그림이 있다. 오로지 이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군더더기 없이 설계된 공간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자신을 완전히 노출한 채 걸려있는 그림들.

그림들은 도록의 약력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미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초대전을 거쳐 신뢰성이 공인된 작가의 작품들이다. 그만큼 우리는 그림으로부터 느끼거나 깨달아야 할 ‘어떤 것’을 강요당하는 느낌에 빠진다. “나는 당신이 느끼거나 깨달아야 할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맞춰보라.” 물론 그림이 주장하는 그 ‘어떤 것’은 진리이다. 그림의 당당한 현전, 거리낌 없는 노출은 자신에게 대상a (objet petit a), 곧 진리가 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일 것이다.

‘사건의 철학자’라고 알려진 알랭 바디우가 예술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라캉의 용어를 빌어 “히스테리환자와 주인의 관계”라고 비유할 때, 그는 그림 앞에 선 감상자가 겪는 당혹감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히스테리 환자는 정신병원에 수감되거나 치료를 위해 약물을 먹어야 되는 그런 환자가 아니다. 그녀는 대타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사람에게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세요”라고 간청하는 자이다. 이 간교한 정신구조는 그 대타자를 대리하는 권위 있는 그가 결코 정확히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당신의 진실은 이것”이라고 말하는 주인에게 그녀는 “그게 아니예요”를 반복하면서 그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답을 요구한다. 자신이 답을 맞힐 수 있다고 오인하는 주인은 끊임없이 답을 요구하는 그녀에게 매혹된다. 그리하여 그는 히스테리 환자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이 된다. 그녀가 욕망하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 관한 진리가 아니라 그녀를 향한 주인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예술은 진리가 아니라 주인을 욕망하는 타락 속에서 남모르게 눈물 흘리고 있다. 물론 그림에 묻은 이 고상한 몇 방울의 눈물 자국으로 그림은 고가의 상품이 되기도 하지만.

이 타락과 욕망의 악무한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그림을 대타자로부터 분리시켜 구해내기 위해 우리가 그림 앞에서 되새겨야 할 것은 진리는 그림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림의 아우라는 진리가 발하는 광휘가 아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되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그림 앞에 선 감상자가 인간-동물의 생태를 교란시키는 ‘무한’에 매혹되어 있는 이상 진리는 여기, 우리 앞에 있다. 이 ‘무한’을 향한 욕망이 없었다면 그림도 작가도 감상자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림의 감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감상자가 다른 어떤 작품도 아닌 이 작품 앞에 서있는 사태는 진리와 어떤 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묻는 작업에서 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이샛별의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다른 장면’이다. 이 ‘다른 장면’은 물론 무의식을 지칭하는 프로이트의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꿈, 말실수, 농담 등을 비시간적 장소(non-temporal locus)인 이 ‘다른 장면’이 드러나는 순간으로 꼽았다. 우리는 꿈을 꾸거나 말실수를 하고 농담을 즐기는 상황에서 의식과 지각의 균열을 경험한다. 꿈속에서는 생시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말실수 중에 우리는 발언하려던 단어가 뒤틀려 전혀 엉뚱한 의미를 구성하는 경험을 하며, 농담을 즐길 때도 역시 단어와 단어의 연관관계가 일상의 용법을 이탈한다. 프로이트에게 이 ‘다른 장면’이 드러나는 순간은 결정적인 순간인데, 무의식은 억압되거나 부인 혹은 폐제된 진리의 문서보관소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이 의식과 지각이 균열되는 순간에 주체의 진실을 슬쩍 드러내면서 의식의 자기 인식, 즉 자아정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는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간략하게나마 ‘다른 장면’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샛별이 탐색하려한 풍경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겠다.

최근까지 이샛별의 작업은 이와 같은 의식과 지각의 균열을 포착하여 상징적 정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화폭에 담긴 하나의 인물은 흔들리기 시작하고(“아래로부터의 봄”, 2008), 인물과 바니걸, 혹은 인물과 꽃 인간의 병치에서 보이는 것처럼 둘로 분열(“The Real”, 2009)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회화적 탐색의 노선이 라캉정신분석학의 삼항관계(triad)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그리고 ‘실재’의 세 차원이 보로매오의 매듭과 같이 연결되어 이루는 인간정신의 역학이야말로 이샛별의 회화가 생산되는 창조력의 원천이었다. <불연속>은 이 삼항관계가 연결되어 있는 매듭의 지점을 보여준다. 화면을 향해 들을 돌리고 있는 우람한 체격의 복싱선수는 바니걸에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언제나 의식을 빠져 달아나던 실재와 눈이 마주친다. 이 순간 셋의 공간은 창밖의 현실과 연결이 끊긴 특이한(singular) 공간이 된다. 이러한 연속성의 중지, 균열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내면의 탐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데, 여기에서 ‘상징적인 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인간 외부의 것, 라캉의 용어로 상징계 혹은 대타자, 다시 말해서 인간적 자연인 사회적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장면” 역시 이러한 탐색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정확한 원근법 구도를 활용하고 있는 <가짜왕>은 이러한 작업의 궤적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래로부터의 봄”(2008)에서 발표한 작품 <상연>에서 화면 전체를 장악했던 로봇과 같은 자아 이상(ego Ideal)은 <가까왕>에서도 원근법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지만, 더 이상 그림 속 인물들에게 주목받지 못한다. 실재의 주체로 표현된 유동물을 내뿜는 인물과 상상적 자아 혹은 이상적 자아로 보이는 바니걸은 열린 화면을 통해 그림 너머에 시선을 던지고 있다. 자아 이상은 사선으로 분할된 화면에서 흑백 모노톤으로 처리된 오른쪽 윗부분과 다채로운 색을 활용한 아래쪽 왼편의 경계지점에서 여전히 후광과 함께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지만 매우 왜소해졌다. 그 사이 아직 구체적인 색채를 부여받지는 못했지만 말을 탄 사람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지니게 된 유동물이 둘로 분열된 주체가 시선을 던지는 화면 외부의 지점으로 균열을 넘어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 <가짜왕>은 “다른 장면”이 상징적 정체의 균열을 시도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아마도 이와 같이 셋으로 분열된 주체를 바탕으로 가늠해볼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삶과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으로 보인다. 이샛별은 선의 진행이 급격히 바뀌는 모서리 지점에 서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샛별의 ‘다른 장면’을 결코 그 의미에 접근할 수 없는 오리무중, 오로지 상상력의 유희만을 위하여 개방된 장소인 “무의식의 풍경”과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프로이트에게도 ‘다른 장면’이라는 개념이 갖는 중요성은 그것이 무의식의 장소라는 의미라는 정도 이상의 것이었다. 거기에는 색다른 질서가 있다. 무의식 안에서 사물들의 의미작용은 결코 의식에서의 그것과 같지 않다. 꿈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이라도 그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지는 못한다. 이는 말실수에서, 예를 들어 우리가 ‘개념’이라는 단어를 왜 자꾸 ‘개년’으로 발음하는지, 또 농담에서 왜 우리가 그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에 배꼽을 잡고 뒤집어지는지가 분명하지 않은 이유와 같다. 그것은 이 무의식의 장소가 언제나 현실의 장소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면서도 현실의 의미작용과는 다른 형식의 의미작용을 통해서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왜 무의식의 의미작용은 의식의 의미작용과 다른 형식을 가지고 전개되는가? 그것은 의식으로부터 억압되고 부인되고 폐제된 것들의 언어, 의식의 언어가 감당할 수 없는 언어, 그것들이 의식의 세계에 드러나는 순간 언어적 상징으로 구성된 현실 자체가 붕괴되는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언어들은 말할 수도 표현될 수도 없으며 물론 그림으로 재현할 수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샛별의 그림들은 표현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 ‘다른 장면’은 그림 너머에 관한 그림이다. 그녀의 그림들이 이전의 것들과는 달리 열린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과거의 그림들의 관람자를 응시함으로써 관람자의 그림에 대한 응시를 소외시키는 효과를 발생시켰다면, ‘다른 장면’의 그림들에서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의 제3의 지점을 향한다. 예를 들어 <언뜻 보이는 섬광>에서 섬광은 그림 내부에 배치되어 있지 않다. 놀이공원인지 공장인지 구별이 모호한 장소에서 상상적 자아와 상징적 자아 그리고 실재적 주체 3인조가 어깨동무를 하거나 동시에 어떤 지점을 바라보았을 때 섬광은 발생한다. 따라서 이 그림에는 시차가 있다. 그림의 시제는 사도 바울의 “아직 아니”이며, 이 “아직 아니”의 시점이 관람객들과 함께 “이미 언제나”로 변화할 때 “언뜻 보이는 섬광”은 발생한다. 이 그림 너머의 장면이 그려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그림은 이샛별의 그림 곳곳에서 넘쳐나는 징그러운 유동물의 천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 두 장면의 시차의 시간과 영원의 시차와 같은 것으로 결코 동일한 형식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징계가 감당할 수 없는 언어가 출현한 장면이다. 그러므로 이 유동물들은 실재의 침입, 즉 단절적인 사건이 임박해있음을 알리는 징표 같은 것이다. <붉은집2> 역시 진행의 방향이 급격히 바뀌는 모서리 지점에 이르기 직전의 상황을 보여준다. 특히 <붉은집2>에서 인물을 비추는 조명은 배경을 비추는 자연 조명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발생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 그림 역시 섬광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아적 시간을 구현하는 작품은 <아티스트>이다.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기적 같은 논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역사철학테제)」에서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를 읽는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파국이란 현실의 질서가 정지하는 순간이다. 벤야민에게 진보란 이 현실의 질서 안에서 전개되는 전진일 뿐이다. 이샛별의 천사는 빈약한 날개로 진보의 폭풍에 저항하며 섬광의 순간과 함께 존재한다. 오늘날 사유 없는 돌진적 진보의 시대에 예술가의 임무는 역사 없는 진보에 저항하며 아직 충분히 발생하지 못한 섬광의 순간을 섬세하게 관찰하여 그 무한한 폭발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티스트의 날개는 빈약하다. 아티스트의 표정에 경이와 결단과 함께 곤혹스러움이 드러나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아티스트>는 또한 <붉은집> 함께 읽을 수 있다. 동일한 그림 제목과 함께 배경의 기학적 평행선 채색을 통해 말레비치를 연상시키는 이 그림 역시 실재와 정면으로 마주친 인물의 경악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붉은집>의 인물은 <아티스트>의 천사와 달리 입을 다물고 있으며, 놀라움 속에서도 결코 응시를 멈추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이샛별 회화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기념사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알랭 바디우는 사랑 정치 과학 예술이라는 진리들을 생산하는 네 개의 공정을 주장하였다. 이 네 가지 공정들의 진리생산을 보증하는 실천은 무엇보다 단절적 순간, 즉 진리사건에 대한 충실성일 것이다. <아티스트>, <붉은집>, <붉은집2>는 예술가가 어느 순간을 자신의 존재가 가능한 공간으로 견지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하나의 선언이자 신앙고백으로 보인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으로서의 ‘다른 장면’에 관한 이해를 급진화하여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고 선언하였다. 나아가 그는 “무의식은 대타자에 관한 담론”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른 장면’은 결코 현실의 장면과 무관하게 구성되는 독자적인 장면이 아니다. 언어가 발원하는 장소인 대타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계이다. 하나의 언어가 또 하나의 언어를 요구하는 무한궤도의 세계, 인간의 욕망은 정확히 이와 같은 언어의 회로도를 닮아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담론의 회로에 포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이를 통해 대타자의 인정과 함께 존재의 아갈마를 획득하려 한다. 그러나 타자의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대타자의 아갈마를 보증해줄 존재는 없으며, 대타자가 아갈마를 가지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이 환상을 횡단하여 대타자의 결여에 직면했을 때 ‘분리’가 발생한다.

이샛별의 그림 <분리>에서 마치 자신의 몸에서 나온듯한 유동물을 힘껏 불고 있는 인물은 환상을 횡단한 자이다. 그녀는 자신과 어떤 언어로도 그 실체를 특정할 수 없는 유동물을 동일시한다. 그녀는 무에 봉착한 주체이다. 그러나 무에 봉착한 주체는 결코 염세적 주체가 아니다. 유달리 생동감 있게 표현된 이 인물은 자신의 무, 즉 유동물에 힘껏 숨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므로 <분리>라는 작품의 다른 이름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혹은 ‘절대 자유’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7). 이 성서의 구절에서 ‘사람’이란 그 실체가 특정되지 않은 유동물로서의 ‘흙’을 의미한다. 그림은 숭고한 이콘화의 정조를 띠는데 이는 인물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신적 작업에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신성모독이나 신의 참칭이 아니다. 오로지 이와 같은 절대적인 재창조에 직면하는 주체야말로 신성의 구체적인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무의식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존하고 인정받기 위하여 적응해야 했던 현실의 논리와 관련하여 구성된다. 언어를 통해 구축된 상징의 세계인 현실은 그런데 이 언어는 의식의 언어처럼 기호의 언어가 아니라 기표의 언어이다. 기호는 이미 하나의 의미 단위인 반면 기표는 의미 이전의 단위들이다. 이샛별이 의미단위인 기호가 의미 이전의 기표로 해체되는 “다른 장면”을 집요하게 탐색하는 이유는 생산력의 포화지점에 이른 현실을 넘어서, 창조력의 포화점에 봉착한 회화의 한계 너머의 지점을 욕망하고 꿈꾸기 때문이다. 현실이 붕괴하는 지점은 전해 다른 논리의 다양성이 넘실거리는 세계이다. 그녀의 해체작업은 냉소주의나 비관주의가 아니라 강력한 낙관적 희망에 이끌리고 있는데, 바로 이 균열과 붕괴의 순간에 세계는 무한한 가소성을 가지고 다시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러한 열망은 <공백>, <소거>, <구성물>, <융기물> 그리고 최종적으로 <통합자>가 표현하고자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응시의 순간은 세계가 공백으로 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공백에서 모든 시선과 담론의 물길을 인도하던 홈 패인 공간들은 공간을 구성하는 어떤 원소도 배제하지 않는 매끄러운 공간, 보편성의 세계로 화한다. 이 그림들의 배경을 이루는 폐쇄된 공장 같은 건축물들이 성스러운 장소처럼 표현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 공간들에서 노동자는 프롤레타리아가 되며 사라지는 존재가 있는 반면 되돌아오는 존재들이 있다. 바니걸이 자신의 얼굴이 가면이었음을 자각하는 순간(<구성물>), 그리고 그것을 제거하는 순간(<소거>) 주체는 스스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다양체로 화한다(<구성물>). 예술가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융기물>) 하나의 파국을 창조할 것이다. <통합자>는 이와 같은 유토피아적 환상의 구현처럼 보인다. 이샛별의 그림에서 가장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그림은 정확히 이러한 정지와 파국의 순간에 대한 관찰이다. 이 순간 과거의 인물들은 다시 돌아와 그들이 실패했던 행위에 다시 착수하며, 그들을 좌절시켰던 세력들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재검토된다. 그 곳은 새로운 가능성들의 싹들이 자라는 공간이지만 서스펜스가 생생한 적대와 긴장의 공간이기도 하다.

“다른 장면”에서 이샛별은 모서리에 서 있다. 그녀는 이곳을 예술가의 장소로 선언하였다. 더 이상의 장소는 없다. 하나의 장면이 끝나고 다른 장면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순간이야말로 무한한 창조성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서야 할 지점을 찾았다. 이제 그녀가 모색해야 할 것은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그 장소를 인지하는 감각의 섬세함과 인지된 감각들에 적절한 의식, 나아가 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장인의 능력일 것이다. 이제 그녀 예술의 새로움은 치열한 예술적 단련에 달린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집중되는 순간은 예술적 의지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림은 그 자체로 진리를 보유하지 못한다. 하지만 예술이 진리공정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진리 효과라는 사건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발생은 철학적으로는 우발적인 것이요 신학적으로는 하느님의 은사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던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진인사하는 자는 대천명에 무관심해질 것이다. 이샛별을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