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컬쳐』, 포커스, 2012, 7월호, pp.70-73, (이샛별 전_Unnarrated, 2012. 5.25-7.7, 아트스페이스 루 & 난다 전_The Day, 2012, 5.12-7. 7, 한미사진미술관)

욕망을 대면하는 두 입장

김성호

이샛별_결핍과 환유의 욕망

이샛별의 회화를 해석했던 그간의 텍스트들에는 다음의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떠돈다. 심리, 무의식, 욕망, 억압, 위장, 정신분석, 상징계, 타자, 대타자, 실재, 허구, 서스펜스, 현실, 초현실… 등.

이와 같은 일련의 단어들에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소쉬르의 언어학으로 재해석했던 라깡의 구조주의적 사유가 물씬 묻어 있다. 라깡은 프로이트가 의식의 억압 아래서 발견했던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된 존재’로 재해석하면서 그것을 의식의 표층으로 끌어올린다.

그녀의 작품 또한 이러한 무의식과 관계한 문제의식을 회화의 표층으로 끌어올려 자신만의 구조화의 욕망을 화면 곳곳에 드러낸다. 그것은 줄무늬 트레이닝복을 입은 세쌍둥이로, 날아다니는 새떼들로, 흘러내리는 이물질의 덩어리로, 동물 가면을 쓴 사람들로, 스산한 문명의 폐허들로, 화면 안에서 분열되고 반복적으로 재배치된다.

그녀의 작품 곳곳에 가득한 초현실적 이미지들은 라캉의 무의식과 그것이 키워내는 욕망의 세계를 닮아있다. 생각해보자. 라깡에 따르면 현실계(실재)란 그가 정초한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 띠처럼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상상계란 거울에 반영된 자신의 허구적 이미지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거울단계로 단지 ‘보기’의 시선만이 존재하는 타자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단계이다. 반면 사물의 이미지를 언어의 세계로 구조화하는 상징계는 ‘봄’의 시선뿐 아니라 ‘보여짐’의 시선을 비로소 인식함으로써 타자를 인식하는 주체를 비로소 형성하는 단계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거울단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와 변증법으로 끊임없이 연결된다. 따라서 ‘상상계의 이미지’와 ‘상징계의 언어’는 고착되기 보다는 양자를 쉼 없이 오고간다. 바로 이 지점에서 라캉의 욕망이 생산하는 시각예술이론이 생성된다.

이샛별의 작품에서 ‘봄’과 ‘보여짐’의 시선은 교차한다. 세쌍둥이 혹은 도플갱어(doppelg?nger)로 나타나는 작가의 분신들은 현실계, 상상계, 상징계에 대한 각각의 은유이자 그것으로부터 미끄러지는 환유가 된다. 눈을 꽃잎으로 덮은 분신은 ‘봄’의 시선에 대해 반성하고 ‘보여짐’에 대해 성찰하는 상징계의 모습이지만 이내 그것이 변증법적으로 교차하는 현실계에 존재하기 위해서 제거된 작가의 분신이 되기도 한다. 동물 형상의 분신은 상상계 속의 이미지로 유추되지만 이내 가면을 뒤집어쓴 상징계 속 욕망의 화신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샛별이 “모든 것은 해석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령처럼 작가노트에서 밝히고 있음에도 그녀의 작품을 대면하는 관객은 해석에서 연신 실패하게 만든다. 그것은 작가가 이미 예견한 것이거나 어쩌면 의도하는 바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의 미끄러짐’은 라캉이 환유의 존재로 바라보는 ‘정신분석적 욕망’이 빚어내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에게서 욕망이라는 기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상태로 새로운 욕망의 기의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데, 이것은 언어학에서 하나의 기표가 새로운 기의들을 지속적으로 만들면서 의미를 연장하는 ‘환유’의 형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난다_과잉과 파국의 욕망

난다의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들이 넘실댄다. 가면, 인형 혹은 인공신체, 가족, 남과여, 성애, 플락스틱 발광체의 상품, 싸구려 화려함, 고의적 B급 정서, 심리적 폭력, 육질의 무엇, 주검 등.

그녀의 작품 곳곳에는 파국으로 치닫는 과도한 욕망의 이미지들이 증식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대개 ‘기념사진’ 즉 기념일을 기록하는 사진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생일, 돌잔치, 입학식,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밸런타인데이, 말복, 결혼, 개업, 장례 등 가능한 상상은 도처에 있다. 행복한 순간, 의미 있는 순간들을 이미지로 기념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폭력, 살육, 살인에 이르기까지 치닫는다. 그것은 축하, 감사, 치하, 조의 등의 이름으로 사건을 주도하거나 가담한 한 주체가 이르게 될 수 있는 가능한 상상의 극단이 된다. 그것은 타자를 대면하는 주체의 과도한 욕망이 야기한 파국에 다름 아니다.

행복과 평안으로 시작한 욕망의 출발지점은 순간의 만족에 이르게 하지만 이내 그것은 끊임없는 불만족의 상황을 증폭시키고 결국 엽기와 같은 파국의 상황으로 치닫게 한다. 아! 그러나 욕망의 끝자리에서 확인하는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되고 만다. 나의 영양 섭취와 보신을 위해서 자리한 풍성한 식사시간은 살육의 현장이었음을, 내가 사랑을 이루기 위해 그(녀)를 초대한 자리가 끔찍한 살인의 현장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개인적 ‘파토스’가 사회적 ‘에토스’를 배반하고 마는 이러한 욕망의 귀결점을 사건화 시키고 작품화함으로써 결국 이 모든 것이 현대 자본주의가 야기한 비틀린 사회적 욕망의 보편적 양상에 다름이 아님을 고발한다. 작가 자신을 작품 이미지에 자주 등장시키면서도 선글라스, 가면, 화장과 미용 등으로 위장함으로써 개별체의 특수성을 상쇄시키는 그녀의 전략은 이러한 사회적 욕망을 탐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또한 수고스러운 노동의 시간을 요청하는 연극적 장치 역시 이러한 사회적 욕망을 초상사진으로 조명하는데 있어 매우 유효한 전략이 된다. 금박의 액자, 벨벳천의 커튼, 무대장치 등은 사건의 특수성을 허구화시키고 보편적인 것으로 전환시킨다. 그녀의 작업은 연극적 장치를 통해 구현된 이미지를 최종 기록하는 ‘만드는 사진(making picture)’의 한 전형을 드러내지만, 한번의 ‘테이킹 픽쳐’로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그래픽 프로그램을 통해 이미지를 작품 의도에 맞게 재정리하는 고단한 후속 보정 작업이 요청된다. 일테면 촬영된 이미지의 모든 부분에 일관된 조명의 밝기를 적용시켜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고의적으로 탈피하고 이미지의 평면성을 강화함으로써 허구성을 창출하는 그녀의 전략은 작품의 주제인 사회적 욕망이란 문제의식을 보다 더 극대화시키는 장치가 된다.

이러한 현대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과잉된 욕망의 초상은 다분히 ‘정신분열증’적 지표를 드러낸다. 아서라! 그것은 표피적으로 파국의 절정으로 이끌지만 그것은 처분되어야 할 질병이기 보다는 건강한 생성운동 자체이기에, 그것을 끌어안고 이 현대의 자본주의사회를 이끌어갈 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임을 작가는 잊지 않고 있다. 그녀의 사진은 사회적 욕망의 지도에 개인적, 소수적 욕망을 끊임없이 투사하고자 하는 노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욕망의 두 입장

이샛별이 개인적 욕망으로부터 사회적 욕망을 환유한다면, 난다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전자의 가면이 심리적 영역이라면, 후자의 가면은 사회적 영역인 것이다. 또한 이샛별이 라깡 식의 언어가 매개하는 정신분석학으로부터 욕망을 사유한다면, 난다는 들뢰즈/가따리 식의 정신분열증으로부터 욕망을 사유한다. 양자 모두는 욕망의 성취에 있어서 불안/공포, 미끄러짐/파국과 같은 각자의 극단의 지점에 도달하는 사유를 인용한다.

동시에 그녀들은 각자가 자리한 사유의 ‘다른 지점’에 대해서 성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샛별에게서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빈틈을 비집고 흘러내리는 ‘살덩어리’와 같은 현실과 비현실을 매개하는 ‘해석체의 이미지’에서 찾아진다면, 난다에게서 그것은 ‘파편적 신체’와 같은 사회와 개인을 매개하는 소수적 욕망에 대한 ‘해석 이미지’에서 찾아진다.

양자의 만나는 지점에는 들뢰즈/가따리의 ‘기관없는 신체’가 자리한다. 이샛별에게서 그것은 ‘서술되지 않은'(unnarrated)’ 그 무엇을 찾아 나서면서도 지금껏 명쾌하게 찾지 못한 그것이 될 수 있는 존재이며, 욕망이 결핍으로부터 근원한다고 과신하는 라캉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무엇이 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울러 난다에게서 그것은 그 동안의 소수적 관심을 보다 근원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동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