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주로 적용하는 모티브인 꽃은 중독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꽃이란 위장막 아래 욕망과 퇴폐, 환각에 중독되어가고, 점점 정신이 좀먹어간다. 그들은 알면서도 얼굴 위의 꽃을 없앨 생각을 못한다. 인물들의 몰개성화된 얼굴은 유희적이고 냉소적인 인간의 단면이다. 그렇게 우리는 위장의 시대에 산다. 사람들은 그 꽃들을 과연 던져버릴 수 있을까. 각각의 인물이 주어진 현실과 짜놓은 현실이란 무대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나의 이야기일까, 당신의 이야기일까. 이것은 현실일까, 환상의 허구일까. 사람들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 뒤늦게 만난 유화 물감과의 운명 2녀 1남 중 둘째로 동두천 소요산에서 태어나 경기도 성남과 강원도 화천 최전방에서 뛰어놀며 자랐고, 중학교 2학년부터 서울에서 쭉 혼자 자취 생활을 했다. 진득하지만 소심한 성격이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잦은 이사로 낯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상황을 자주 접했다. 그때마다 곤혹스러워 혼자 논 덕분에 나만의 생각을 끄집어내는 그림에 매력을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낙서와 만화 보기가 낙이었고, 손재주 좀 있다는 주위 어른들의 시선을 받으며 어린 시절부터 화가의 로망을 키웠다. 그렇게 차곡차곡 적립한 그림 전공의 꿈은 경제 여건 때문에 좌절. 결국 3학년 때 서울산업대로 편입해 남보단 늦은 나이 스물여섯에 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내 업은 회화 작가구나!’ 하고 느꼈을 때는 아무리 덧발라도 끝나지 않는 유화 물감과 캔버스, 연필이 아닌 나도 이제 붓으로 그린다는 쾌감. 그 경이로웠던 시작의 행복함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각종 세계 아트페어에서 아시아 컬렉터들의 주목을 받는 그녀는 이름 그대로 샛별처럼 빛을 받는 작가로 성장하고 있다.
# 비밀스러운 꿈의 뒷면 이샛별의 작업은 남의 꿈을 엿보는 은밀한 기분을 자아낸다. 낭만적상상이라기보다는 무의식 속에서 억압된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이상한 사건과 사건이 연결되고,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긴박한 긴장감이 도는 꿈. 보는 이마다 다른 감정이 이입되어 해석되어야 하는, 무한 반복적인 강박의 꿈이다. 일순간 기분이 묘해지는 그녀의 그림을보다보면 ‘물 밑’이란 키워드가 떠오른다. 잔잔하고 고요한 수면 아래에서 감추고픈 내면의 뒷모습이 드러나는 듯한 당혹감. 이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는 삶의 인위성을 드러내는 제거
된 진실이며, 반드시 드러나고 마는 진실을 억압된 형태로 관람객과 마주한다. 원래 감추어진 진실은 대체로 조금 불편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당당히 까발려진 속 알맹이는 당혹스러운 만큼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이중성을 지녔다. 마치 공포 만화의 대가 이토 준지의 작품처럼, 수많은 컬렉터와 큐레이터가 열광하는 코드다.
# 그림 속 무대를 연출하는 작가 이샛별의 작품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존재한다. 첫째로 꽃들이 인상적이다. 최근, 인물의 얼굴에 피어나기 시작한 꽃의 모티브는 환상을 통해 현실을 만화경처럼 보고 있는 인물들의 시선을 뜻한다. 환상을 생산해내는 꽃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조용한 미소는 아이러니다. 표정을 싹 걷어낸 주인공들이 마치 기념사진 찍듯 부자연스럽게 굳은 모습 또한 특징적이다. 이 인위적인 인물들은 작품 속, 무대에서 상연되고 있는 어떤 장면들을 연기한다. 강한 조명 아래에서 화면 밖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경직된 모습으로 주춤거리기도 하면서 작가가 설정한 시놉시스를 따라간다. 무대의 배우가 문득 카메라를(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작가와 친구들이 주 모델인데, 모두 둥근 얼굴로 그림으로써 서로 비슷해 보이게 연출했다는 것이 작품을 최종 디렉팅한 이샛별의 의도. 그래서 일부러 사건에 개입되는 주인공이나 관찰자들은 상징적이고 희화화된 느낌을 주었고, 스치는 외부 인물들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나누어 표현했다. 이러한 설정들이 모여서 남의 꿈을 헤집는 기분을 유발하고, 관람자는 그들의 연기에 대입되면서 곧 몰입해버리고 만다. 환상 속 인물은 타자이지만, 어느새 자신으로 바뀌는 이상한 경험을 유도한다. 관객을 작품 속으로 끌어 당기는 힘이 무서울 정도다.
# 추리소설식 작업 방식 그녀는 먼저 통합된 주제어를 잡고 관련 이미지와 이야기를 모은다. 혹은 반대로 어떤 이미지들을 모은 후 그것을 통합하는 단어를 고른다. 개인전을 할 때마다 ‘위장 → 중독 → 봄날은 간다 → 아래로부터의 봄 → The REAL → 다른장면’으로 제목이 붙는 이유다. 한 작품씩 차근차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작업을 벌려놓고 시험공부를 하듯이 벼락치기 공법으로 몰아친다. 캔버스 속 진행될 이야기와 화면 구성, 대상의 형태와 색들의 조합. 이 쉽지 않은 수수께끼를 풀어가느라 고민은 쉬이 끝나지 않는다. 그림 안에서도 끝없는 불만이 쏟아진다. 생각과 감각이 고인 물처럼 썩지 않게 해야 하니까, 쉽고 편하게 가려
는 마음을 다잡는다. 생각이 느려질 때는 평상시 채집한 책 속의 문장, 노래 가사, 섬뜩하리만치 강렬한 이미지 등 힌트를 다시 상기하면서 영감을 끌어낸다. 깨알만큼 자주 주입하는 인문학 공부도 그녀의 생활과 작업을 형성하는 조각. 히치콕의 영화 속 살인으로부터 사건이 시작되어 전개되는 작품 <서스펜스> 시리즈, 안개 속을 헤매듯이 더듬더듬 사건을 해결해가는 작품 <더 리얼> 시리즈처럼. 추리소설을 집필하는 형태로 붓을 드는 제작 패턴이 매우 흥미롭다.
# 창조적 생기와 끝없는 좌절의 반복 ‘그린다’는 노동을 통해 태어나는 버거운 작업의 뭉근한 매력이 있다. 특히 삶에 창조적 상상력의 생기를 부여한다. 그리면서 느끼는 좌절과 인내를 통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면 어떤 날은 그 그림이 숨 쉬게 하고, 또 어떤 날은 그 그림이 목을 조른다. 양날의 칼이다. 부족한 자신을 봐야 하고, 또 이상의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 이샛별에게 그림은 언제나 아슬아슬 잡히지 않는 어떤 안타까움과 동시에 근질거림의 설렘을 준다.
# 전업 작가의 길 오는 5월 21일에는 여섯 번째 개인전 <다른 장면 The other scene>이 서울의 그문화 갤러리와 부산의 아리랑 갤러리에서 한 달간 동시에 열린다. 7월에는 2인전, 8월 두 개의 그룹전이 잡혔다. 현재는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리는 <경기도의 힘>전이 진행 중. 이렇게 바쁜 여름이 진정되는 대로 천장 높은 작업실로 옮기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야망이고, 꿈꾸는 것을 계속 실현해내는 전업 작가로 먹고사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다. 한 여름밤의 꿈. 이 기묘한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작가 이샛별의 붓이 앞으로도 쉬지 않고 움직여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