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샛별과의 인터뷰는 마치 그의 전시 제목처럼, 시작부터 나의 예상과는 ‘다른장면’을 만들며 이어졌다. 오프닝 전날, 신작을 둘러보며 차근차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찾은 서울의 전시장은 갑작스레 가벽을 세우는 등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맛있는 커피집을 알아 놨다며 누군가 그려준 약도를 들고 함께 찾아간 카페에서, 작가는 대화 초반 어느 대목에선가 ‘리얼리즘 회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는 그의 그림을 (굳이 분류하자면) 초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기자에센 분명 ‘다른’대답으로 다가왔다. “제 관심사는 늘 ‘리얼리즘’에 관한 것이었어요. 대학 시절부터 케테 콜비츠의 그림이나 멕시코 벽화, 그런 인물이 자세히 드러나는 그림을 유독 좋아했어요. 가난하던 학생시절에 없는 돈을 긁어 모아 화집을 사 보곤 했죠.” 그의 지난 작업을 돌이켜 보니 <오! 서커스> <봄날은 간다> 시리즈처럼 ‘정치’소재를 회화 전면에 끌어온 적도 있긴 하다. 하지만 분명 그의 최근작들은 사실적이기보다는, 머릿속 환상을 화폭에 옮겨 놓은 상징과 은유에 가깝지 않은가.
개인이 갖고 있는 내면의 괴물성
화면 가득한 얼굴의 눈에서 커다란 꽃이 피어난다. ‘작가 이샛별’하면 떠오르는 그림이다. 사실 그는 작가로 첫 발을 내딛던 시절부터 이미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잡지에 나온 꽃 이미지 위에 사람을 그려 그 꽃 이미지의 일부를 지우거나 혹은 더 많은 꽃을 그린 <위장> 시리즈가 그의 첫 개인전 작업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과제가 아닌 이상 제 스스로 풍경이나 정물을 선택해 그려본 적이 없어요. 늘 인물만 그렸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물에는 사진에도 담아낼 수 없는 순간적인 특징이 있잖아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게 마냥 흥미로웠어요”
인물에 대한 관심과 초기의 ‘꽃’모티프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완성된 이 연작에서 작가는 ‘본다는 것’ 즉 ‘시각’에 대한 반문을 던진다. 스스로 전혀 의도하지 않아도 본대로 믿어버리거나 혹은 봐도 ale지 않는 상태, 그런 환상들을 발생시키는 시선 자체를 꽃으로 가려버린 것이다. 사실 이러한 그의 과장된 인물들은 얼핏 보면 ‘피식’웃음을 터뜨릴 만큼 유머러스하다. 하지만 자꾸만 들여다볼수록 이내 그로테스크한 블랙 유머가 강하게 감지된다. 생각해 보면 초기작부터 그의 그림은 밝고 경쾌하기보다는 어두운 경향이 짙었다. 그러한 견해를 많이 들어 왔는지, 작가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제 마음 속 한 부분이 예쁘고 웃기고 귀여운 것들을 마냥 한 방향으로 가지 못하게끔 잡고 있는게 아닐까요? 사회의 어두운 이면, 개인이 갖고 있는 괴물성, 우리가 살고 있는 상징 세계에 가려진 이면의 어떤 것들을 포착해서 그리고 싶은 마음이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마음이 더 절실해졌는지, 지난 해 개인전부터 이샛별은 그림 속에 더 많은 것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화면에 늘 등장하는 특유의 인물,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상, 갖가지 다양한 상황들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가짜왕’ ‘불연속’ ‘통합자’와 같은 상징적인 제목 또한 보는 이로 하여금 단순히 이미지 자체를 즐길 게 아니라 완결된 어떤 이야기를 만들도록 유도하는 듯하다. 사실 이 장면들은 작가가 다양한 매체에서 ‘채집’한 이미지들이다. 즉 상상이 아닌, 지극한 현실에서 온 것이다.
“최근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건’이란 실제 있었던 특정한 사건, 혹은 각종 개인 블로그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발견한 이미지들을 사용하기도 해요.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과 연결되는 단어를 인터넷 검색창에 치면 그와 관련된 다양한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와요, 그 중 눈에 들어오는 것, 혹은 특정 사건이나 뉴스를 보다가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맞아떨어질 때 그것을 모은 후 나중에 그림 속에 조합합니다.” 그렇게 그는 현실에서 벌어진 경악할 만한 무시무시한 사건부터 어이없고 웃긴 사소한 사건들을 하나의 화면에서 모아 새롭게 사건화함으로써,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제각각 새로운 내용들을 생성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돌려 말하는 현실
최근작에서도 장면을 이끄는 주인공은 역시 ‘인물’이다. 한 인물과 그와 똑같은 복장에 가면을 쓴 인물이 쌍을 이루어 등장하는 것은 ‘도플갱어’를 암시한다. 즉 가면을 쓰거나 눈에 꽃이 핀 사람들은 존재하기 위해서 제거된 어두운 나, 혹은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제거되야만 했던 어떤 존재들을 상징한다. 작가는 이 모티프가 몇 해 전 우연한 기회에 공부하게 된 정신분석과 후기 구조주의 이론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했다. “4년 전쯤일 거예요. 그때까지 약 4년간 공백이 있었어요 그 시간 동안 작업을 안 하면서 제 스스로가 비워져 가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생계부터 작업까지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한꺼번에 닥쳐서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죠 그렇게 몇 년을 멍하게 보냈던 것 같아요” 설상가상으로 당시 교통사고를 당한 이샛별은 병문안을 온 한 지인과 그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의 권유로 라캉의 이론에 대해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그때 다시 살아난 것 같아요. 그 동안 내 마음에 열정이 없어져서 그랬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때부터 공부를 통해서 그림에 대한 ?상상력이 다시 열리면서 인물 초상화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한 거죠. 물론 제가 당시 그러한 인문학적 내용들을 다소 감각적으로 받아들인 건지도 몰라요 단, 다른 것을 떠나서 그것이 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림에 등장하는 모티프를 넘어 저에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되살려 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렇게 이샛별은 스스로와 깊게 밀착된 개인적인 현실과 그를 둘러 싼 거대한 현실을 두루 뒤섞으며 작업에 담아 낸다. 이미 대학시절 노래패 활동으로 시작된 현실에 대한 관심은 곧 ‘현실을 반영하는 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림은 늘 현실과 직결되는 것 아닐까요? 예를 들어 예전 민중미술 시기는 워낙 당시 정치적 상황 등이 바로 직결되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시절이었기에 그림도 직접적이고 사실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런 현실의 폭력들이 교묘히 감춰져서 더 고단수로 진행되는 시기잖아요. 그러니 그림도 무언가 돌리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어쩌면 저도 현실의 모습을 좀 더 우회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거죠.”
이샛별과의 대화를 마친 후 이튿날, 부산의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을 바라보던 중 우연히 그의 진난 해 개인전 제목이 ‘The real’이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는 지난 해 새로운 방식으로 그림 속에 지금 이 ‘실제현실’을 담기를 모색했고, 지금은 그렇게 현실의 ‘다른 장면’을 그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이 ‘이샛별 식 리얼리즘’ 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