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랑미술제에서 이샛별의 이 얼굴그림을 보았다.
눈동자를 대신해 박혀있는 활짝 벌어진 꽃, 동공에서 꽃이 피어오르는, 눈이 꽃이 된 인간의 얼굴이 증명사진처럼 정면성을 향해 보는 이를 응시한다. 좀처럼 눈을 떼기가 어렵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2001년도 그녀의 첫 개인전 도록에는 ‘위장얼굴시리즈’가 있었는데 그때 이미 몸과 꽃이, 얼굴과 꽃이 마구 뒤섞이고 눈이 꽃이 된 그림들이 보였다. 분명 보았는데 그동안 기억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서 꽃들이 피어나고 연필이 박혀있는가 하면(이선경) 핏물과 눈물이 줄줄 쏟아지는 그림(김정욱)과 눈동자를 대신해 타인의 몸이 그대로 들어와 박혀있는 박정애의 조각(추억)도 떠오른다. 이샛별의 얼굴은 한결같이 크고 둥글며(호빵맨처럼) 귀는 없고 비교적 큼지막한 코와 얇은 입술, 고른 치아, 얼굴 상단에 겨우 흔적을 남기며 단정하게 놓인 머리털로 형상화되어있다. 그 얼굴 중심에 커다란 안경, 선글라스처럼 꽃이 눈을 지우고, 은폐하고 대신한다. 그리고 머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몸이 다소 구부정하게, 경직되게 그려졌다. 본인의 얼굴을 닮았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이 그린 얼굴은 한결같이 작가 자신을 닮아있다. 이샛별의 얼굴그림도 그렇다. 얼굴은 우리 몸의 맨 위에 붙어서 타자의 눈에 자기 몸의 내. 외부, 의식과 무의식의 일단을 거침없이 발설하는 장소이자 무의식이 의식화되는 장소, 따라서 양가적인 장소다. 우리는 모두 어떤 얼굴을 하고 다닌다. 그 얼굴은 타자들의 욕망으로 조립된 얼굴이다. 작가는 자신의 얼굴과 타자의 얼굴에서 그 흔적을 읽는다. 따라서 그것은 본인의 얼굴이면서도 동시에 모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얼굴이다. ‘나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다. 나와 함께 경쟁, 상호인정 등의 거울 같은 단계에서 연루되어 있는 동료 인간존재들인데 그것이 타자의 의미다. 그래서 다양한 인간의 얼굴 역시 동일하게 정형화되어 있다. 다르면서도 동일하고 나의 얼굴/타자의 얼굴이 구분 없이 포개져있는 형국이다. 그것은 일종의 가면이다. 우리가 진정한 자신이라고 규정하는 것에서보다 가면에 더 많은 진리가 있으며 진리가 표명되는 방식은 허구를 가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귀담아 듣는다면 우리의 사회적 정체성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가면임을 깨닫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억압된 태도들을 드러낼 때 비로소 우리는 가면을 의식할 수 있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미술일 수 있기를 이샛별은 바란다. ‘현실에서의 억압을 가리는 커튼이 아니라 억압되고 배척된 적대와 트라우마를 투사하는’ 실재의 화면(스크린)이기를 말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의 제목이 ‘THE REAL’인가 보다.
‘불가사의한 통합’, ‘귀환’, ‘서스펜스’, ‘어떤 주체’,‘실재’ 등의 제목들은 어딘지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떠올려준다. 인물들은 대부분 부동의 자세로 직립해있거나 앉아있다. 마치 기념사진을 찍듯이 정면을 응시한다. 긴장되고 불안한 표정이다. 혹은 기이한 상황이 설정된 장소에서, 무대에서 경직된 상황을 연기하는 인물들은 모두 무의미한 시선을 한 체 돌연 멈춰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새와 비행기의 어두운 그림자(감추어진 것이 실재에 나타난 것들)가 인물위로 드리워져있는가 하면 비현실적인 풍경에 나무들이 자라고 그 나뭇가지에는 살덩어리들이 죽은 잎처럼 매달려있다. 이 살덩어리는 일종의 트라우마다. 가려진 것들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상징적 제스처로만 나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단다. 아울러 신전, 거대한 구조물의 공간, 신전과 동상(맥아더와 이순신)등은 근대의 신화나 집단적 이데올로기, 거대한 상징계를 암시하는 이미지들이다. 인공의 조명이 강렬하게 인물들을 조준하고 있어서 어딘지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들은 관자를 의식하는 시선을 지니고 있다. 무척 영화적이고 연극적인 설정이다. 작가는 이미지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다중적으로 전개한다. 이 정지한 듯한 영상의 이미지는 자연스럽지 않은 인위적인 상황과 배경은 연출된 거리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영상의 미학 안에서 의미 있게 다루어지는 미장센에 유사하다. 그러니까 내용적 소재들을 화면에 배치하여 그 자체 이야기구조를 갖게 하는 미장센의 그림들이다. 그리고 카메라워크와 앵글의 시선도 녹아있다. 동시에 논리적으로 연관 없는 대상들을 이웃하게 놓는 초현실적인 수사법도 두드러진다. 여러 이미지들을 따다 붙이고 기존 상황이나 이미지를 절단한 후 인용하고 접합하는 콜라주 정신 역시 차용되고 있다. 작가는 대화중에 히치콕 영화를 좋아하고 또 자주 본다고 말한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그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내러티브의 반복적 구조, 인터페이스 스크린이 미장센에 도입되는 방식, 응시의 오점을 만들어내는 카메라 워킹과 몽타주의 결합, 욕망 혹은 충동에 의해 규정되는 캐릭터의 특징’을 통해 실재의 표상이 될 수 있었던 그 영화의 수법을 이샛별은 적극 수용한다. (히치콕 영화의 한 장면, 장면을 차용해 이를 자기만의 욕망에 맞게 읽어나가면서 형상화한 일련의 드로잉도 그 좋은 예다)
꿈과 같이 연출된 이 그림의 현실풍경 속에는 환상의 이야기가 있고 그 판타지에는 리얼리즘이 들어있다. 라캉이 실재는 꿈 너머에서 찾아져야만 한다고 했던가. 작가는 현실을 꿈으로 의역한다. 꿈이야말로 욕망의 실재를 전시하는 유일한 시공간이지 않던가.
작가는 어떤 리얼리티/실재를 그리고자 한다. 실재의 귀환? 그녀는 자신의 그림이 관자들에게 상징계의 규범을 알려주고 상상적 나르시시즘의 투사로 이끄는 한편 섬뜩한 실재적 상황과 대면하는 순간을 열어젖힐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림보기의 체험이란 결국 관객을 실재 앞으로 소환하는 일이다. 우리의 사회현실 자체가 상징적 허구나 환상에 의해 유지된다면 예술/미술이 궁극적으로 성취하는 것은 내러티브 허구 속에서 현실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허구는 현실을 이(오)해하도록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현실 자체의 허구적 측면을 분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 자체를 하나의 허구로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위장’과 ‘중독’연작을 통해 그녀는 “우리 삶에서의 의미심장한 중요성의 결핍, 즉 규정된 문화와 정의의 뒤틀림과 허구성, 고립과 소외에 의한 개개인의 주체성 상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작가노트, 2001)했다. 당시 등장한 꽃은 현대 사회구조의 은유물로서 현대인들을 욕망하게 하고 중독 시켜 삶의 영역에서 자신을 유폐시키는 환각제를 상징했다. 꽃으로 위장을 해야만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현대인의 비애 같은 것도 묻어있다. 환상은 사회적으로만 구성될 수 있으며, 사회적인 욕망을 받을 때에만 가치를 갖는데 왜냐하면 환상이라는 무대에서 작동하는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환상의 대상들은 우리를 매혹하며 욕망하지만, 동시에 대상들은 우리를 유혹한다. 우리는 대상의 대상이 되며, 따라서 주체는 사라지고 대상의 세계를 구상하는 일부로 전락하고 만다. 이 같은 인식과 관심은 이후 정신분석학과 영화이론 등의 공부를 통해 좀 더 깊어지고 정교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반면 그러한 이론, 텍스트가 현실을 보는 놀라운 안목을 제공해주고 핵심을 짚어주지만 동시에 그러한 논리의 도해로만 그림이 알리바이화 되지는 않을까하는 약간의 우려도 있다. 이제 꽃은 석화된 자연, 자연을 대신해 불멸하는 인공의 것, 시뮬라크르, 헛된 욕망과 환상에 사로잡힌 자아를 상징하는 이미지다. 오늘날 삶은 욕망의 세계다. 욕망, 곧 환상을 지지하고 장식하는 수많은 상품들을 소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그것은 자기 얼굴을 갖지 못하고 꽃으로 대체해 살아가는 얼굴 그 자체이자 ‘환상에 사로잡힌 시선의 발생지’(정혁현)다. 그것은 동시에 가면이다.
이 가면은 진짜 얼굴을 감추고 있다기보다는 그 가면 안의 유령이라는 ‘제3의 현실’을 낳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있고 위협적이다. 그 얼굴은 갑자기 그 무엇인가를 발설하고 폭로한다. 대책 없이 벌어진 꽃의 내부와 벌린 입은 외설적(꽃은 성기와 항문을 떠올려주기도 한다)이면서도 우리의 본래 얼굴이 무엇이었던가를 질문하다.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실재라고 믿고 보았던가? 내 본 모습은, 자아는 무엇인가?
얼굴의 윤곽과 내부는 몇 겹으로 흔들린다. 마치 영화의 ‘들고 찍기’처럼 이 흔들리는 화면은 보는 주체가 흔들리는 느낌을 준다. 정신분석 안에서는 ‘나’를 고유한 병리적 증상의 소유자로 인식한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를 어지럽혀온 모든 얼굴들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샛별의 얼굴그림도 그러하다. 불안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얼굴들은 언제나 ‘나’의 욕망을 조직하고 통제해온 ‘대타자’의 욕망과 구분되는 진정한 주체가 되기를 열망하는 도정에 놓여있다. 아울러 이 흔들림은 상상계의 근원적인 불안정성을 표상한다. 실재란 이상적 자아가 아무리 완벽하고 매혹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결국 자아이미지가 되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차이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대상에 새겨진 타자의 응시 그 자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없고 타자와의 차이 속에서 흔들린다. 나는 무수한 타자의 조합이고 타자의 욕망이다. 그러니까 ‘타자들의 욕망으로 조립된 자아상’이 나란 얘기다. “나는 내가 존재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라캉)
사실 우리가 객관적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환상의 소산이며 우리가 환상이라고 치부하는 허구는 현실이 그토록 애써 배척했던 실재가 상연되는 무대이다. 현실과 실재의 경계선에서 상징적 현실의 허구성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또 다른 진실인 실재와의 대면으로 이끄는 것이 환상의 또 다른 기능일 것이다. 실재는 현실에서 확실히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실재란 사유의 그물에 잡히지는 않지만 의식외부에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결코 부정될 수 없는 존재의 질서이다. 따라서 주체에게 실재는 파악될 수 없는 동시에 언제든 귀환하여 그 질서가 사실은 주체의 환상을 매개로 구성된 것임을 폭로함으로써 상징적 질서를 탈구시킬 수 있는 외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주체에게 현실은 곧 환상이다. 환상이란 현실과 구분되는 비현실적, 비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가 주체화(상징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포기한 충동의 실재를 중핵삼아 세계를 현실로서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틀이라고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욕망을 출현시켰던 근본 환상을 무너뜨리고 그동안 대타자의 욕망에 응답하여 구성했던 환상의 스크린과 그 스크린의 격자에 맞춰 구성해왔던 현실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이샛별의 회화가 자리한다.
*이 글은 라캉과 지젝의 저서, 그리고 김소연의 <라캉과 한국영화>, <실재의 죽음> 등의 여러 글들을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