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미술 2017. 8월호 Special Artist p100~107)
신체 없는 사람들이 숲을 걷는다. 숲을 서성인다. 머뭇거린다. 숲속에 사람들이 있으나 숲의 녹색의 일부로 녹아든다. 사람들은 녹색의 얼룩 같다. 뭔가 사건이 벌어지려는 듯 어떤 전조가 있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다.
이샛별 작가는 <녹색에코> 연작의 작업 노트에서 그리스신화 속 나르시수스를 사랑한 ‘에코’를 ‘신체 없이 떠도는 목소리’라고 썼다. ‘신체 없는’이란 표현은 매력적이다. 우리의 미적 감각과 정신이 존재 가능하도록 하는 물리적 바탕이지만 사실 신체란 굴레인 것이다. 신체가 없다면 오직 정신만으로 존재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원인 무효인 것이다.
‘신체 없음’이란 20세기를 사는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했다. 신체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작가는 남을 따라 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에코에게서 자기 없음의 비극성을 말한다. 문제의 출발은 매번 타자인 것이다. 나의 존재성 결핍이다. 이샛별의 근작 <굽은 거울> 시리즈도 다르지 않다. 마치 에코의 은유처럼 존재하는 사람들의 초상이다. 자기성 또는 주체로 서지 못하는 유령 같은 사람들이다. <부드러운 밤> 시리즈의 사람들도 그 형태가 모호하다. 덜 그려졌거나 한쪽으로 쓸려가고 있다. 마치 잘못 찍은 사진 이미지처럼 보인다. 2001년 작들인 <위장> 시리즈를 떠올려보면 이샛별의 작품들은 점차 부드러워졌다. 사람들은 사람 형태가 아니라 유령 형태를 닮았다. 귀신이라고 해도 좋다. 사람을 닮았으나 단지 닮았을 뿐이지 그 실체는 결코 사람이 아닌 듯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차라리 사람 얼굴 형태로 자라난 풀, 식물들의 군락으로 보였다. 숲이 되기 전의 기묘한 생태이다.
이샛별의 작업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거울’의 모티브 또한 자기 없음을 반영한다. 거울은 표면이 매끄러운 친절한 타자이다. 친절한 타자는 결코 나를 안심시키지 못한다. 친절의 과잉 상태는 나를 더욱 불안하게 할 수도 있다. 2006년 <봄날은 간다> 시리즈의 인물들도 얼굴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떨어지는 꽃잎이 공교롭게 인물을 가리고 있었다. 주체의 얼굴은 부분으로만 보인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코, 전체로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주체란 결핍 또는 부분으로만 존재하거나 결핍 그 자체가 주체일지도 모른다. 2008년 <스무 개의 그림자> 시리즈는 과장된 형태로 초현실적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꽃으로 눈을 가린 가면 같은 얼굴이 반복된다. 꽃으로 인해 얼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체의 얼굴을 덮은 가면인 것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꽃’의 이미지는 근대이전 전통사회의 집합적 의식을 떠오르게 한다. 무교巫敎와 꽃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은유한다는, 무교에서 꽃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무당이 사자의 역할일 때 꽃은 망자를 모셔가는 것을, 망자를 상징할 때는 이상세계를 뜻한다. 어찌 되었든 꽃은 신체보다는 혼을 상징하고 서로 다른 차원을 연결하는 매개인 것이다.
2009년 <귀환>이나 <실재의 그림자>는 양식화되어 있다. 마치 어른을 위한 우화처럼 그려졌다. 2012년 <사라진 부분> 시리즈는 이전의 초상 이미지에 눈을 특별히 더 강조하고 있다. 과장되게 크게 그려진 눈은 순정만화 속 호수 같은 눈이다. 그러나 순정만화의 그 맑고 투명한 산뜻함과는 거리가 멀다. 호수라기보다는 늪 같다고 해야 할까? 기괴하다. 2012년 작들인 <보충들>, <클라인의 항아리>, <휘어진 자>, <녹색 기반> 등은 2017년 작업을 떠올릴 정도로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고 있다. 다양한 이미지가 콜라주 되어 인간 심리의 복잡성이 연출된다. 특히 2014년 작인 <인터페이스 풍경>, <진공지대>는 우울한 푸른색조로 채색된 것 말고는 2017년 작과 다르지 않다. 2017년 <녹색에코> 시리즈의 중심 키워드는 ‘녹색’이다. 푸른 색조가 녹색으로 변했다. 형태와 달리 컬러는 작가의 심리상태와 직결된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푸른 색조, 그것도 매우 우울한 분위기의 컬러에서 푸르른 녹색조로 변한 것이다. 작가가 구체적인 조형적 표현과 재료를 선택한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어떤 변화를 감지할 뿐이다.
다른 차원에서
이샛별의 작업은 일관되게 개인과 집단 사이의 긴장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작가의 관심사는 어찌 되었든 개인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다. 작가의 작품에는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많은 사람의 얼굴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그들에 대한 어떤 진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보는 작가 자신의 심리상태를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은 2001년 이후 변치 않고 반복되는 분위기다. 그 분위기는 생生보다는 사死의 기운으로 채워진다. 작가 노트를 읽어보자.
“녹색의 에코란 무엇일까? 녹색이 메아리로 녹색의 에코란 무엇일까? 녹색이 메아리로 되돌아온다면 그것은 어떤 색이며 형태이며 소리일까? 죽었어도 자기 죽음을 알지 못하고 끝없이 무덤에서 살아나는 좀비처럼 푸르고 싱싱한 녹색은 다른 어떤 것을 계속 추가해가며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우리 눈앞에 드러나고 있다. 녹색의 얇디얇은 살갗을 살짝 들추면 거기에는 곪아터진 살과 피와 끈끈한 액체와 너덜대는 근육이 뒤엉킨 시뻘건 죽음의 덩어리가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적응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세계에서 근본적인 것은 절대 바꾸지 않으면서 그저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우리의 지독한 관성에 진정한 욕망의 에코를, 녹색이 녹색으로 존재하기 위해 제거한 것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한다…(중략)..중요한 것은 아무리 가리고 숨기고 아니라고 거짓을 말해도 그것들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보지 않으려고 억압한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끝끝내 당신의 삶 속으로 되돌아온다.-작가노트 (2017)”
사람들은 보기에 생생하게 잘살고 있는 것 같지만 죽어있다는 소리다. 작가의 푸른 녹색 숲은 생명력으로 충만한 겉모습이 거꾸로 죽음의 부패를 가리는 화장처럼 이해된다. 우리는 보기보다 잘살고 있지 않다. 평균적인 현대인의 삶 또는 작가 자신을 포함해 주위 사람들은 ‘좀비’와 같은 삶으로 여겨진다. 좀비는 죽었으나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좀비를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은 ‘허기虛飢’다. 결핍을 채우려고 본능만이 남는다. 차라리 존재의 의미가 투명하리만큼 순수하다. 20세가 중반 이후 등장한 고스(또는 고딕)의 정서다.
이샛별의 이미지들은 마치 어른이 된 앨리스가 만났을 법한 세계이다. 이 세계는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 알 만큼 안다는 오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상식과 논리는 과잉과 과소 사이를 왕복한다. 유령이든 필연이든 괴물이나 짐승과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극히 평범한 주인공은 이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와 조우한다. 이미지와 언어가 풍성하게 제시되지만, 불통의 감각만이 더 예민해진다. 절망, 폭력, 공포, 부조리, 검은 유머 등 컬트 무비의 주인공들처럼 극적이다. 컬트 무비의 주인공들은 보통 시민들이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이들은 영혼의 상태를 시각화한다. 위악僞惡의 유형학이다. 음모론의 세계관이 배어있어 음모와 비밀을 파헤치다 보면 사실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거나 유령이었다는 식이다. 그들의 감각과 세계는 어딘가 비틀려 있다. 현실 세계를 닮았으나 단지 외형이 닮았을 뿐이지 본질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다. 풍경이건 사람이건 눈에 보이는 형상은 모두 의심스럽다.
작가는 오랫동안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변주해왔다.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마치 무대 위 어떤 과장된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을 연기하는 존재들을 그린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피부는 자연스럽지 않고 마치 특수분장을 위한 고무처럼 인간의 피부를 닮은 다른 사물의 질감이다. 그런데 이번 개인전 <굽은 거울> 시리즈의 인물들은 매우 자연주의적이다. 이들의 눈동자가 녹색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마치 ‘녹색에코’를 바라보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형상은 일상을 닮아가는데 정작 그 이면의 심리는 더욱 심화되어 회복 불가능한 비극적 상황이다. 망자의 이미지를 닮은 이들의 얼굴에서 세월호의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기괴한 풍경과 초상을 통해 거꾸로 평범한 일상으로 귀환한다. 작가의 채색과 드로잉은 그 강렬한 시각성으로 인해 눈먼 장님의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깜깜한 방, 막막한 현실 속에서 짐승의 몸짓으로 기록한 듯 시각보다는 후각과 촉각이 생생하다. 지금 여기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역설적으로 현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상식과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반복되면, 그리고 그것을 견딜 수 없을 때 우리는 한편으로는 영웅을, 다른 한편으로는 귀신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