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샛별의 풍경 작업은 생태 위기라는 인류 앞에 닥친 파국을 주제로 한다. 하지만 거기에 통상적인 비판이 상상하는 훼손된 자연이나 생태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조화롭고 이상적인 풍경은 없다. 2013년 <녹색 파국> 이래 작가가 제시하는 풍경은 과도하게 울창한 원시림 혹은 밀림이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생명력을 드러내며 보는 이를 압도하는 짙은 녹색의 위용은 어딘지 외설적이고 불길한 느낌마저 풍긴다. 

   이 풍경에는 놀라운 아이러니가 있다. 작가는 호주의 자연 국립공원을 사진 촬영하여 그림으로 옮겼다. 원시림은 후기 자본주의 도시 문명에서 볼거리를 찾아 관광 온 사람들을 위해 보존된 스펙터클이다. 풍경이 주는 외설스러움은 작가가 시선의 투명성을 흐리는 자본주의적 응시를 회화적으로 포착해낸 결과다. 이 풍경에서 때 묻지 않은 원시의 자연은 없다. 인간의 접근을 제한해서 흘러넘치듯이 우거진 녹색의 식물들은 오히려 자본주의 문명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부추긴 욕망의 시선을 벌거벗기고 있을 뿐이다. 

   폭이 5m가 넘는 대작 ‘레이어스케이프’ 두 점을 보자. 자연국립공원의 울창한 원시림과 훼손된 자연 풍경―독성 녹조로 오염된 강이나 녹아버린 북극의 빙하 등―이 몽타주 되어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작가의 관점에서 이 두 극단에 있는 대립물은 모두 자본주의적 욕망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다. 이 변증법적 풍경에서 우리의 시선을 일순간 아뜩하게 만드는 광점이 번쩍인다. 눈을 멀게 만드는 응시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샛별은 집요하게 시각의 장에서 주체가 출현하는 불가능한 순간을 가시화한다. 2008년 <아래로부터의 봄>부터 실험은 주로 인물화를 통해 다채롭게 시도되었다. 부풀어 오른 자아 이미지를 형상화한 화면을 가득 메운 얼굴에서는 시선의 근원인 눈이 회화적 변주의 장소가 된다. 응시와 마주친 눈동자는 텅 빈 구멍으로 부패하고,응결된 망막은 응시를 반사하며 반짝인다. 인물의 눈에서 피어난 화려한 꽃은 욕망의 시선을 상징하며 그 자체로 눈을 맹목으로 만들고 있다. 원근법적 시선을 추상한 원뿔 도형은 뒤집힌 형태로 인물의 눈에 들러붙는다. 그는 응시의 대상이 된 시선의 주체다. 심하게 흔들리는 인물 그림들은 정체성의 동요를, 인물과 배경의 색채가 구별되지 않는 인물화는 자아 주체의 소멸을, 윤곽이 흐물흐물해 마치 유령처럼 부유하는 듯한 인물은 얼룩으로 화하여 배경의 일부로 흡수되는 자아 이미지를 보여준다. 

  2013년 <녹색 파국>은 이샛별이 본격적으로 생태위기와 기후위기에 개입하는 전환점이다. 분열된 주체들의 이러저러한 순간들을 콜라주 형식으로 구성했던 욕망의 풍경에 갑자기 녹색 물감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다가온 파국은 주체의 출현이 더욱 절실한 공간이다. 

   이 강박적인 반복의 바탕에 ‘분열된 주체’라는 정신분석적 개념이 있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로 태어나지만, 그의 육체는 언어의 식민지가 된다. 하지만 분열은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분열은 언어적 질서에 편입된 의식과 이 과정에서 떨어져 나와 억압된 무의식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 결과는 인간을 기묘한 존재로 만든다. 라깡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존재와 유리되어 생각하는 자는 타자의 욕망으로 추동되며 타자의 말을 하고 궁극적으로 타자의 삶을 사는 자다. 그는 자기로부터 소외되어 있지만 스스로 주체라고 오인한다. 그는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다. 문명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존재의 욕망을 포기한 자는 타자의 삶을 산다. 자본주의 문명은 이처럼 소외된 삶의 서식지로서 최적화되었다. 소비 자본주의는 모든 욕망이 물질의 소비를 향해 정렬한 전체주의 체제다. 오로지 물질의 소비를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세계는 맹렬한 속도로 자신의 물질적 토대를 약탈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이제 파국을 지각하면서도 절멸을 초래하는 삶의 양식을 멈추지 못한다. 

   타자의 욕망이라는 주술에서 풀려나 물질의 소비를 필요의 수준에 한정하여 파괴를 멈추고 욕망은 각자의 고유한 존재를 향하는 다른 삶, 다른 세계의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이샛별은 시각의 장에서 그 가능성을 찾는다. 그 지평은 타자의 욕망을 제거한 자신의 공백과 만나는 주체의 허무, 응시와 만나는 눈의 재앙, 존재와 맞닥뜨린 코기토의 붕괴에서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샛별의 풍경화는 그 불가능한 만남의 순간이 형상화되는 장소다. 

   풍경화에서 그 순간은 풍경을 침입해 들어오는 실재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는 인물화에서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2013년 <녹색 파국>, 2017년 <녹색 에코>에서 실재는 화면을 뭉그러뜨리는 이면의 힘이다. 마치 투명 아크릴판에 작용하는 열기가 매끄러운 표면을 부풀려 왜곡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풍경은 그 자체로 실재의 응시를 가리는 스크린이 된다. 그러나 스크린은 응시의 에너지를 완전히 차단하지 못한다. 응시의 열기를 받아 녹아내리는 화면은 왜상으로 오염된다. 2018~2019년 <녹색 에코>에서 시도는 더욱 도발적으로 감행된다. 구경거리로 보존된 원시림을 바라보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시선은 혐오스러운 형상의 유기물 덩어리로 되돌아와 화면 이곳저곳에 적체된다. 유전자공학의 끔찍한 결과들로 보이는 이 물질들은 제대로 분화되지 않은 채 과잉 증식된 내장기관들이다. 원시 자연의 신화적 풍경은 돌연 종말의 스펙터클로 바뀐다. 하지만 이면의 에너지가 풍경에 얼룩을 만들거나 형태가 모호한 유기물 덩어리가 표면에 배치되는 방식은 강력한‘언캐니’ 효과를 자아내지만 여전히 사물(das Ding)을 일종의 실체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실재의 침입이라는‘비-현실’을 현실 내부의 사건으로 가져와 주체의 출현이라는 기적적인 사건을 내재적인 가능성 안에서 장악하는데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딜레마는 이번 <레이어스케이프>에서 완전히 극복되었다. 작가는 디지털 영상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친숙한’ 경험 속에서 이를 발견한다. 화면은 디지털 영상의 깨짐 현상을 포착한다. 이 시도는 이전의 인물화에서 종종 시도된 적이 있었지만, 인물과 풍경 양쪽을 아우르는 형식적 일관성을 획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디지털 영상에서 화면이 깨져 유연한 윤곽선들이 사각형의 모자이크 조각들로 해체되는 현상은 제거돼야 할 노이즈 혹은 버그로 인식된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시뮬라크라, 즉 디지털 영상의 비현실성을 철저하게 감추는 테크놀로지를 기대한다. 이샛별의 전략은 이 기대를 거스르며 디지털 노이즈를 실재로서 현실 내부로 가져와 전시하는 것이다. 모자이크 현상은 이면의 힘이나 이질적인 물질 등 신화적이며 초재적인 실체가 도래해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디지털 영상 테크놀로지의 내재적인 논리 안에서 발생한다. 

   이번 전시가 2008년 <아래로부터의 봄> 이래 시도된‘주체 출현의 가시화’라는 기획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2021년 <레이어스케이프>에는 전략적 차원의 대전환이 있다. 그간 ‘실재의 침입’은 낯설고 불쾌하며 섬뜩한 것이었다. 화면은 불가능성에 짓눌린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매혹적인 것이 되었다. 이번 작품들에서 형상화된 사물은 결코 구석에서 괴괴한 형상으로 나타나 화면 전체에 불길한 기운을 드리우지 않는다. 깨진 화면으로 나타나는 디지털 노이즈 형상은 다른 시뮬라크라들과 거의 대등하게 공간을 분점하며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주장한다. 게다가 현란한 색채를 과시한다. 그것은 일종의 내재적 에피파니다. 

  2021년 <레이어스케이프>에서 우리는 가시화 된 “객관적 우연”, 가능성으로 차고 넘치는 불가능성을 체감할 수 있다. 화면에서는 현실 안에 자신의 지위를 요구하는 비현실의 아우성이 들린다. 게다가 구상 안에서,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비구상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기념할만한 성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