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회화적 표현력을 가진 녹색의 짙은 숲을 그린 그녀의 그림은 세기말적 파국의 냄새가 났다. 싱그러운 생명의 색으로 각인된 녹색은 이샛별에게는 문명 속에 포섭된 자연, 곧 문명화된 자연으로 포장된 자본주의의 폭력을 나타내는 색이다. 그녀의 일련의 연작들은 ‘녹색’의 개념을 두고 거대한 지구적 담론 속에 개인의 서사를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녀는 녹색과 자연은 자본이 제공하는 숲의 이미지를 그려내지만, 그 그려진 것들의 진실은 녹색에 대한 보편적인 관념을 뚫고 들어온다. 그녀는 회화를 통해서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방패로 자기의 이기심만을 주장하는 인간 사회를 비판하고자 한다.

그녀의 <그린 에코> 시리즈의 작품에는 환상적인 숲속의 풍경 속에 연인이나 가족의 관계로 읽힐 수 있는 인간들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 <그린 에코No.4>는 흰색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팔로 안아 감고 마치 기념사진을 찍는 듯한 포즈를 취한 장면을 그린 것으로, 극렬하게 엄습해오는 파국의 숲의 이미지들은 금방이라도 그들을 덮칠 것처럼 보인다. 캔버스 위로 일렁이는 숲은 생명력이 느껴지기보다는 쓰레기 더미로 뒤덮인 듯 어지럽고, 깊은 숲의 어둠을 배경으로 얼굴이 없는 남녀의 모습에는 죽음 앞둔, 재난의 전조와 같은 공포와 상실의 기운이 느껴진다.

“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성경, 아가서 2장 6~7절)

하필이면 내가 떠올린 시 구절은 사랑의 설렘으로 기다리는 신부의 간청이다. 그것은 지구의 파국, 자연의 파괴 앞에서 눈을 감고 사랑의 경전이나 읊어대는 우매한 인간들의 모습 같다. 재난과 죽음의 징후들을 읽어 내리는 것을 현대에서는 지구 생태계의 변화 속에 예측하고 진단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우매하고 이기적이며 나약하다.

그녀가 그린 <스키너 Skinner>의 연작들에서도 이러한 기운들은 가득하다. 아니 더욱 명확하게 회화로 표현한다. 배우나 연예인으로 가늠 직한 아름답고 젊은 청춘 남녀의 초상들을 가득 채운 녹색의 내장들, 마치 고름처럼 변해버린 신경조직이나, 지방 덩어리나 내장과 같은 살 색으로 치장된 모습들은 화려하고, 다듬어진 외관의 이미지와는 상충하여 그려져 있다.

곪아 터질 것 같은 피하(皮下)를 드러내는 그림은 나를 포함한 미래의 죽음을 맞이할 살아있는 유령들의 초상으로 보인다. 자본과 이기심으로 다듬어진 매끈한 피부를 걷어내고, 사랑에 빠진 눈빛과 세레나데를 부르는 입술을 지우자 연인들의 모습은 지옥의 문 앞을 서성이는 유령들과 같이 보인다.

이샛별의 그림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세계’에 대한 기대를 처참히 무너뜨리게 한다. 유토피아적 환상, 그녀는 그것을 몰락과 쇠락의 이미지로, 종말과 파국의 이미지로 그렸다. 철학과 글로 습득한 그녀의 세계관은 그녀의 회화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 되었고, 그녀는 감정이나 심리적 기제로 빚어지는 불안과 공포의 표현이 아닌, 상징과 아포리아를 동반한 그림으로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이샛별은 ‘다른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증상이 드러나고 익숙한 세계가 이질적인 요소로 뒤덮이는, 눈앞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숲에서 그 붕괴를 암시하는 흐느적거리는 현상을 목도하는 것, 그럴듯하게 봉합한 현실의 풍경이 균열하는 이런 순간에 대한 관찰은 전혀 다른 논리의 다양성이 넘실거리는 세계에 대한 발견일 것이다.”

그녀가 그려낸 녹색이라는 환상은 파국의 이미지, 자본주의 리얼리티로 빚어진 세계의 파국에 대한 회화적 환영(幻影, illusion)으로, 사실적 감각을 녹색으로 왜곡시켜 시각적 판단을 멀게 하고, 사랑, 반짝임, 꽃, 미(美)에 대한 이미지를 회화로 표현함으로써 자본주의 속의 인간욕망의 사실을 비틀리게 한다. 모든 것이 소비되는 사회, 그러나 녹색, 자연, 환경, 사랑, 우정들은 마치 아닌 것 같은 눈속임으로 현재의 사실을 왜곡하고, 우리가 모두 바라는 유토피아를 광고의 카피처럼 복화술로 읊게 만드는 녹색, 연인, 가족, 사랑, 아름다움,,,

두렵게도 미래의 인류에게 다가온 사실은 디스토피아에 대한 현실이다. 이샛별은 자본주의 리얼리티의 폐허와 파괴된 숲 사이를 걷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회화적 환영으로 표현하여, 미리 피하고자 했던 저열한 혐오나 이름 붙일 수 없는 고름과 내장 속의 덩어리들과 같은 것에 대한 역겨움마저도 반어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진정 스스로 솔직하게 “리얼해지는” 자연의 상태를 마주할 수 있는지를 회화로 묻는다.

환경 재앙이 그러한 실재 중의 하나다. 분명 어떤 층위에서 환경문제는 자본주의 문화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후변화나 자원 고갈 위험은 억압되기보다는 오히려 광고나 마케팅에 통합되고 있다. 결국 지구 위의 대부분의 생존자인 우리는 ‘자본주의 리얼리티’에 동물적으로, 존재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환영으로 뒤덮인 현 세계에서 환경재앙을 막는 일은 “끊임없이 시장을 확장해야 할 필요”, 자본의 “성장이라는 물신”의 환영으로부터 깨어나는 일뿐이다.

그녀는 회화를 통해서 녹색의 환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성에 반복적인 메시지를 전신한다. 그것들은 예술을 초월한 녹색의 쟁점이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디스토피아로의 몰락을 경고하는 메아리들이다. 회화적 어법으로 보자면, 자본주의의 리얼리티와 파국의 자연의 모습들을 환상적으로 보이게 하는 녹색, 부글거리는 물풍선, 흘러내리는 풍경, 투명막의 건너로 들여다보는 듯한 비현실적인 장면들로 눈과 귀를 틀어막고 웅얼거리는 논쟁들, 그것들이 가득 차 풍성하게 넘치는 자연스럽고 세련된 색의 조화와 화면구성이다. 이러한 회화적 기법들로 인해 녹색의 환영들은 우울증적인 쾌락의 정원이거나 에덴의 낙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레더릭 제임슨이 “도발적인 미학적 모델”로 이야기한 순수한 물질적 기표들에 대한 경험들이 집합된 듯한 그녀의 회화는 치밀하게 계산돼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다시 그녀의 작업을 들춰본다.

그녀의 회화적 성찰은 어떤 세계의 형태를 그려내고 있는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번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물리칠 수 있는 회화적 실천이 가능한 것인지, 이미지로만 형성된 끝없는 의미작용의 놀이를 멈추고, 이제 우리 스스로가 변화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다는 것을 알기에, 이샛별의 회화는 호락호락하지 않는 이성과 미학의 경계에서 스펙터클한 줄다리기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