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임무는 새로운 감각체제를 구성하는 일이다. 예술은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하며 들리지 않던 것을 들을 수 있는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무슨 초인들의 능력을 가져와야 한다는 말이거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처럼 예민한 기호적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언어적 인간인 한 감각의 근원인 육체 역시 기표로 덧씌워져 있다. 육체를 감싸고 있는 기표는 질서 없는 흐름 속에 있지 않으며 특정한 지점, 곧 누빔점(point de capiton)을 중심으로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 체계는 그 자체로 인간의 가능성이자 한계이다. 말을 사용하는 인간의 감각이 기표체계의 영향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은 비역사적 사실이지만, 이 체계의 성격은 언제나 역사적이다. 어떤 인간의 정신적-감각적 체계는 주어진 시대의 상징체계를 체현하는 대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시대의 한계는 주체의 한계를 구조 지으며, 주체의 가능성은 시대의 가능성을 지탱한다. 예술이 새로운 감각체계를 실험하는 것은 바로 이 다른 한계와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실험은 특정한 누빔점을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이 시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핵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각과 인지 그리고 사유체계를 재구성하는 문제 혹은 “거듭남”의 문제이기 때문에 항상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 이 죽음은 물론 상징적인 죽음이다. 하지만 이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무를 체험하는 과정이기에 생물학적인 죽음보다 더 끔찍하고 두려운 것이다.
이샛별의 그림이 불길한 매혹과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 차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녀는 일련의 궤적을 거쳐 인간의 운명과 시대의 한계 그리고 다른 장면의 가능성과 씨름하고 있다. 그 궤적은 삶의 도구로서 위장을 필요로 하는 추한 존재에 대한 양가감정, 즉 환멸과 매혹에서 시작되었다(2001년 위장). 양가감정은 양자택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환멸이 매혹을 부추기고 다시 매혹이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상승작용 속에 있는 묘한 역학관계였다(2002년 중독). 그녀는 잠시 이 중독을 향유한다(2004년 서커스, 오! 서커스, 2006년 봄날은 간다). 꽃들이 가득 프린트 된 배경에 작가의 내면과 그 내면에 투영된 사회현실을 묘사하는 이 시기에 그녀의 오브제들은 환각에 빠진 신체처럼 모호한 관계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이샛별은 2008년 “아래로부터의 봄”을 계기로 스타일의 전환을 이룬다. 꽃 프린트 배경과 함께 몽환적인 분위기가 사라진다. 그 대신 꽃이나 프레임 혹은 명암 등에 의해 가려졌던 얼굴이 외설스러울 정도로 화면 전체를 점령한다. 그 얼굴들이 거북스럽고 섬뜩한 이유는 인격적인 내면을 조금도 암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한 표면, 무의미한 거죽이었다. 구멍 뚫린 얼굴, 그 얼굴은 관람자에게 상상적인 동일시를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심연으로 빨아들였다. 눈이 있어야할 자리에 그려진 흐드러진 꽃들은 그 심연의 구멍과 중첩되어 “악의 꽃”처럼 농염하였다. 이 전환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이 포착하는 세계가 아니라 작가가 그녀 자신으로 포착되는 시선, 다시 말해 응시에 다가서고 있었다. 거기, 그녀 자신의 죽음이 크게 쓰여 있는 그 시선을 향해서 말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샛별은 라캉주의 정신분석학, 구체적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이론적 작업을 이미지화 하는 시도에 들어간다. 이후 그녀의 작업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정신분석의 이미지를 세공하는 과정 속에 있다.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신화적인 내면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증상을 중심으로 얽혀있는 보로매오 매듭, 즉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그리고 실재 사이의 구조적인 관계를 탐색한다. 이 때 증상의 주체는 개인일 수도 집단일 수도 심지어 문명일 수도 있다.
라캉은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론을 전개하였다. 정신분석학자의 회화론은 결코 외도가 아니다. 인간을 쾌락원칙을 넘어 몰아가는 충동의 대상?는 궁극적으로 무(無) 그 자체이지만, 이는 언제나 젖가슴, 똥, 응시, 목소리와 같은 부분 대상들로 제시된다. 이러한 충동의 대상들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화적인 낙원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정신분석학의 ‘분리’라는 개념으로 지시되는 슬픈 사연을 가진 것들이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경악이며 공포이다. 그것은 낙원이 갑자기 그 기반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그 순간, 낙원이었던 타자가 욕망의 주체로 자신의 결여를 드러내는 그 순간, 도무지 속내를 파악할 수 없는 존재 앞에 내던져져 무기력하게 ‘케보이?’(Che vuoi??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가요?)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의 흔적들이다. 인간은 이 두 번째 상실, 상실의 상실, 주체의 결여라는 상실과 타자의 결여라는 또 하나의 상실을 통해서 욕망의 원인 대상?를 얻는다. 대상?는 삶의 맥거핀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찌꺼기에 불과한 것이 세상 모든 것에 상응하는 보물, 아갈마가 된다. 인간은 그것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뒤쫓으며 살아간다. 그들이 뼈저리게 느끼고 접하는 냉혹한 현실, 그것은 바로 이 대상?에 특수조명을 설치한 무대, 환상구성물이다. 여기에 개입하지 않고서는 변화를 주장하는 어떤 구호라도 공염불일 뿐이다.
라캉은 자신의 열한 번째 세미나에서 기원전 4세기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었던 파라시오스와 제욱시스의 일화를 들려주며 응시를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시관충동에 관해 이야기한다. 제욱시스가 포도송이를 그리자 새들이 쪼아 먹기 위해서 날아들었다. 제욱시스는 새들을 속였다. 반면 파라시오스는 베일을 그렸다. 이를 본 제욱시스는 “자 이제 베일을 걷고 자네가 그린 걸 보여주게”라고 졸랐다.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의 눈을 유혹한 것이다. 베일은 보이지 않는 것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욕망의 원인대상 ?였다. 제욱시스는 베일 그림 앞에서 시선의 불가능성에 마주치게 하였다. 인간의 시선은 투명하게 세계를 반영하는 단순한 기관이 아니라 욕망을 통해 세계를 왜곡시키는 작인이다. 세계는 오로지 욕망을 통해 일그러지고 나서야 인간에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드러나는 세계 속에는 인간 자신, 그 욕망의 중핵이 공간을 휘게 만드는 블랙홀처럼 포함되어 있다. 세계는 그 보는 주체를 반성한다.
라캉에게 주체와 무관하게 형식적 유희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순수형식미학은 기만이다. 회화는 제멋대로 유희할 수 없다. 욕망의 시선이 그 회화적 대상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파라시오스의 그림이 제욱시스의 시선을 불가능성과 만나게 했다면, 그 그림은 단순히 파라시오스의 장인적 능력을 증명하는 증거물이거나 내면이 투사된 대상일 수만은 없다. 그림은 그 자체로 주체적 기능을 한 것이다. 그 기능은 분석가의 기능에 해당한다. 스스로 시선의 주체라고 자임하는 제욱시스의 상상적 나르시시즘을 난국에 빠뜨려 자신의 진실에 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기능 말이다. 라캉은 그림에 분석가의 위치를 부여했다. 그렇다면 작가와 관람자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들은 카우치에 누워야 한다. 그리고 그림 ‘너머’를 보려했던 자신의 충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충동이 있었던 곳에서 주체로 태어나기 위해서(Wo es war, Soll Ich werden.)
“녹색 파국”은 이 파국적인 시대가 앓고 있는 종말의 증상에 붙여진 이름이다. 생태위기에 직면해서 유기농 먹거리를 꼼꼼히 챙기고, 생명을 존중해서 각별히 옥체를 보존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환경을 파괴한 근대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뉴에이지 영성주의에 심취하여 삼라만상의 조화를 도모하는 이 쾌락적인 말종 인간의 시대에 말이다. “녹색 파국”이라는 주제 하에 기획된 그림들은 그녀의 다른 어떤 개인전보다 이 시대의 증상들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증상들에 관해 회화적으로 논평한다. 그 방법은 이중화(doubling)이다. 녹색을 그 내부로부터 분열시키기, 그리하여 녹색을 녹색과 대면시키기, 녹색 안에서 녹색이 불가능한 지점을 식별하기이다.
작가는 이런 이중화를 드러내는 양식으로서 몽타주를 선택하고 있다. 하나의 장면만을 보여주는 작품은 단 한 점도 없다. 모든 작품들에 여러 장면들을 중첩시키며 이러한 장면들이 서로 충돌하여 작품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구성한다. 두 개 이상의 작품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부유하는 인간들, 청소년들의 폭력, 천박한 시민폭동과 이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경찰들 등이다. 그리고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예의 삼인조들이 이 장면을 관찰하거나 흉내내며 때론 이들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화면 바깥을 향해 서있다. 이러한 장면들이 충돌하는 몽타주 효과가 “녹색 파국”이라는 의미를 향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몽타주 기법과 관련해서 특히 <푸른 골짜기>는 한 화면 속에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배치되는 방식을 벗어나 화면을 분할하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가장 순수한 자연이 보존되어 있을 것 같은 푸른 골짜기에서 초원의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은 사선으로 배치되어 위태로워 보인다. 공포를 자아내는 검푸른 자연이 이들을 내리누르며 쾌적한 휴식을 차단하고 있다. 거대한 설산이 화면 중심 오른 쪽에서 솟아올라 버티고 서있다. 실재로서의 자연 그 자체인 이 설산은 모든 쾌락을 파괴하는 불가능한 향유의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가 모든 장면들에 검은 구름을 드리운다. 자연을 사랑하고 즐기는 이들의 휴식이 오히려 재앙으로 화하는 듯 역설적인 풍경 속에서 식사가 준비된 식탁은 핏빛으로 물들어간다. 화면은 그 식탁에서부터 급작스럽게 일그러진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 II>에 나오는 액체합금 터미네이터의 한 부분처럼 말이다. 토끼 가면을 쓴 인물이 이 금속성 왜상을 관찰하고 있다. 작가는 바로 그 파국의 순간에 집착한다. 저기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 붕괴를 암시하는 흐느적거리는 현상을 목도하는 작가는 분명 망상적이다. 그러나 이 정신병적 망상은 터무니없지 않다. 현실의 약한 고리에서 발생하는 이 예술적 망상은 폐쇄된 현실을 불확실성을 향해서 개방한다. 라캉은 이러한 작가의 망상을 가리켜 “비판적 망상”이라 지칭하여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이번 전시 작품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거의 모든 작품들이 짙은 녹색을 주조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녹색은 회색빛 문명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자연을 상기시킨다. 녹색 자연에는 쉼이 있으며 생명이 있고 따라서 치유의 신비와 영적 기운이 흐른다고 믿는다. 이는 물론 자연의 실상이 아니다. 도시인들에게 환상적으로 투영된 자연 이미지일 뿐이다. 서구 사회는 전통적으로 녹색을 불길한 것으로 보았다. 그 파괴적인 힘에 무력했으며 그 분노를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안전한 삶을 보장해 주는 문명 외부의 낯선 것이었다. 아마도 영화 속 에일리언이나 괴수의 피부색이나 피의 색깔이 녹색인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녹색이 인간에게 쾌적한 느낌을 준다면 그것이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문명 속에 포섭된 자연, 곧 문명화된 자연이기 때문이다. 이 문명화의 실질적인 내용은 자본의 식민지화이다. 그러므로 “오지 트래킹”이라는 여행 상품은 자연을 체험하는 상품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정복지를 확인하는 자본의 성지순례인 셈이다. “녹색 파국” 속의 녹색은 결코 투명할 수 없다. 작가는 다양한 푸른색 계열의 색을 덧입히는 동시에 여러 색의 물감을 떨어뜨려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염된 색채를 재현한다. 그리하여 가볍고 쾌적한 활동의 싱그러운 배경이 되어야 할 녹색이 무거운 기운으로 화면을 압도한다.
<유사 평정>은 이러한 녹색의 역설을 희비극으로 포착하고 있다. 부유하는 인간들은 울창해 보이는 밀림을 향하고 있다. 관람객에게 뒷모습을 보이는 두 사람이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운 밀림 속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뒷모습은 어쩐지 자유롭게 부유하며 밀림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을 선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뜬금없이 소방수 복장을 한 사람이 수색견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고 있다. 작가는 이 소동에 컴퓨터 화면에 뜬 커서를 그려 넣었다. 이 커서를 조작하여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화면을 당겨 보자. 숲의 실체가 드러난다. 저 숲 너머. 그림의 오른쪽 윗부분을 자세히 보면 물감이 흘러내린 자국들은 마치 대도시의 마천루들, 혹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한판의 소동은 아파트 단지 안에 조성된 작은 숲에서 일어난 소극이 아닐까? 자본주의의 정원으로 전락한 밀림! 녹색은 더 이상 회색과 대립하지 않는다. 자연 자체가 이미 문명화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근본적으로 말해서 상징적으로 포섭되지 않은 자연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무의미 때문에 인간에게는 섬뜩한 것이 된다. 작가에게 녹색은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대안일 수 없다. 녹색대안은 오히려 자본주의를 강화한다. 녹색의 쾌적한 삶은 더 많은 노동의 착취를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녹색은 이미 고급 상품인 셈이다. 지젝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동경해마지 않는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 부부의 삶이 오히려 자연에게는 재앙이라고 일갈한다. 이미 지구가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과포화 된 인구가 자연 속에 들어가 사는 삶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지구의 생태는 완전히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태위기는 자연을 사랑하는 낭만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작가는 우리 앞에 지금껏 생각해 보지 못했던 녹색을 던져놓는다.
이와 관련해서 대부분의 작품들에 출현하는 모티브인 부유하는 인간들의 의미를 검토해보자. 이들은 이미 광고카피로도 전용되어 온 들뢰즈의 ‘노마드’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들뢰즈에게 노마드는 상징적으로 구획된 현실에 포섭되지 않고 유목적인 행동방식을 통해서 탈주의 삶을 실현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노마드들을 니체의 “말종인간”(Last Man)으로 인식한다. 니체는 역사에 마지막이 있다면, 이 마지막 때를 사는 인간은 말종인간일 것라고 말했다. 보통 “최후의 인간”이라고 번역되는 말종인간에게 “최후”라는 말의 뉘앙스가 풍기는 장엄한 비애는 조금도 없다. 그들에게는 초월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말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떤 끔찍한 상황이라도 결코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의지의 의지에 “행복”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 말종인간들을 위한 상품목록으로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콜 없는 맥주, 무지방 아이스크림, 사이버 섹스 등등을 열거한다. 그들은 어떤 부담도 회피하여 결국 삶의 실체 자체를 잃어버린다. 이들이 그림 속에서 탈색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생존, 편안한 생존만이 삶의 목적이 된다. 그들은 결국 인간을 인간으로 변별하는 핵심적인 특성을 상실한다. 바로 “완강한 애착”, 즉 고집이다. 고집은 병리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고집 없이 적절한 처세술을 구현하며 현실의 단물만 빨아대는 인간에게서 어떤 인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가 그들에게서 역겨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얼굴에서 짐승을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은 대상에 대한 “완고한 애착”이 아닌가? 예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완고한 애착”이 아닌가? 지적 추구는 진리에 대한 “완고한 애착”이 아닌가? 바디우는 이를 “충실성”이라고 지칭하였고 기독교는 이를 “믿음”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동시에 광기이기도 하다. 이 병리적인 상태, 제정신이 아니어서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이런 비인간적 열정이 역설적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변별하는 핵심적인 특성이다.
<완강한 애착>을 보자. 다른 그림에 비해 간결한 이 그림은 긴장의 장소인 폐공장을 무의미하게 부유하며 스쳐 지나가는 말종인간들을 배경으로 고집스러운 표정의 한 인물이 전면에 그려져 있다. 그는 이 완고한 애착 속에서 스스로 현실이 중지되는 지점, 곧 왜상으로 화한다. ?<근경-희극>이 동일한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변주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물은 탈색되어 사라지고 있다. 세계에서 지워지는 인물은 자신의 상징적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내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의 모든 작품들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모티브는 폐공장 이미지이다. 대표적으로 <“거의”라는 세계>를 보자. 폐허, 그리고 왜 하필 공장일까? 단서를 풀기 위해 우리는 바로크 시대의 폐허의 화가 위베르 로베르까지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유행하던 바니타스(Vanitas, 인생무상) 회화를 특징짓는 요소 중의 하나는 풍경에 폐허 이미지를 삽입하는 것이었다. 그림에 삽입된 폐허가 된 건축물은 대개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이념적 고향이 된 그리스 로마시대의 위대한 건축물이었다. 따라서 바니타스는 사라진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향수였다. 하지만 로베르는 바니타스의 정신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한다. 그의 대표작 <로마 폐허에서의 주사위 게임>은 과거 영웅들의 장소였던 건축물에서 이제는 뭇사람들이 시시한 게임이나 즐기며 노닥거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로베르에게 폐허는 더 이상 상실된 이상을 향수하는 애도의 장소가 아니라 삶과 세계의 긴장에 찬 우연성이 발견되는 장소이다. 영원할 것 같던 이상의 장소가 민중들의 놀이터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주사위놀이는 그 예측 불가능한 시간을 암시한다. 로베르에게 폐허는 이제 미래를 향한 시간의 실타래를 푸는 장소가 된다. 시간의 비결정성은 주어진 시대의 기득권자들에게는 재앙이지만 그렇지 못한 민중들에게는 희망의 장소가 된다. 발터 벤야민이 폐허가 된 19세기 아케이드에 매료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크 회화의 폐허 이미지와 같은 울림을 갖는다. 폐허는 메시아적 시간을 향한 긴장으로 가득 찬 장소이다. 그에게 폐허의 상징은 무상함에 불과했지만 그 알레고리는 불확실한 시간을 향해 열려진 개방성을 의미하였다. 폐허는 폐쇄된 세계를 뚫어버리는 우연성과 잠재성의 장소이다. 폐공장에는 항상 방향이 역전되는 계단이 배치된다. 잠재성의 장소에서 항상성은 중지된다.
<푸른 종> 역시 이 우발성 혹은 우연성을 다룬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연,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이 유서 깊은 귀족이다. 나는 이것을 모든 사물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모든 사물을 목적에의 예속 상태로부터 구제하였다. 내가 사물들 위에 그리고 사물을 통해 그 어떤 영원한 의지도 의지하지 않는다고 가르쳤을 때 나는 이 자유와 하늘의 명랑함을 푸른 종처럼 모든 사물 위에 걸어놓은 것이다.” 자연은 빛이 바래고 공간은 부유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가운데 이 붕괴하는 세계를 지배했던 법이 폐지되는 종소리가 들린다. 푸른 종소리. 우리는 이제 “거의”(das Beinahme)라는 개념이 갖는 긴장의 잠재성도 이해할 수 있다. “거의”는 니체의 “정오” 혹은 “모서리”라는 개념과 유사하며, 하나가 둘이 되는 장소 혹은 시점을 의미한다. <“거의”라는 세계>에서 모든 인물과 사건은 이 분기의 순간을 배경으로 하여 배치되고 있다. 그림은 춤과 폭력의 분출이라는, 한 장소에서 가능하지 않은 두 사건을 몽타주하고 있다. 이 몽타주는 우리에게 춤과 폭력 사이의 무한판단을 요구한다. 부담 없이 즐기는 평화로운 한 판의 춤은 어떻게 이 세계에 분출하는 무의미한 폭력과 일치하는가? 그 대답을 질문으로 대체해 보자. 모든 부담을 회피하고 “완강한 애착” 혹은 대의를 상실한 말종인간의 무기력한 평화주의 속에서 우리는 대체 어떤 방식으로 삶을 느끼는가? 삶에 관한 생생한 느낌이 흐릿해지는 일상에서 말종인간들이 그토록 원하는 행복은 가능한가? 정신분석학은 충동은 궁극적으로 죽음충동이라고 주장한다. “완강한 애착”은 충동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인간은 이 위험한 충동을 제거하고도 존재할 수 있을까? 이유 없는 폭력은 말종인간이 증거하는 마지막 때의 표지이다. 이 세계는 이제 분기점에 “거의” 다 온 것이다.
작가에게 근원적인 전환을 회피하는 말종인간들의 세계, 자신의 현실에서 부정성을 부인하며 원만구족한 삶을 지고의 것으로 여기는 주체들의 세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정위되어 있다. <사라지는 순간>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장면들을 변주한 <서스펜스>를 더욱 완성도 높게 전개하고 있다. 중산층 부부는 이미 세계와 함께 탈색되고 일그러져 가는 붕괴의 힘에 빨려들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결정된 파국을 부인하며 앙상한 숲에 안주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저 멀리 이 세계의 파국과 대면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신적인 존재를 만나며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대타자의 결여를 부인하면서 현실에 집착하는 말종인간들의 태도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도 나타난다. 그들은 대타자를 지탱하는 또 다른 대타자, 즉 대타자의 대타자를 설정한다. 그들은 의식의 차원에서는 모든 권위를 냉소한다. 하지만 무의식적 믿음의 차원에서는 흔들리는 대타자를 부여잡는 더 큰 권위에 머리를 조아린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이야말로 권력의 작동을 가능하게 한다. 소위 “UFO 음모이론” 따위가 이런 것이 아닌가? 무기력한 권력 당국이 전지전능한 존재인 외계인의 실존 증거들을 감추고 있다는 주장 말이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외계인들이야말로 음모이론이 무기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권력에 대한 무의식적 믿음이다. 모든 것을 잃어도 변화만은 안 된다는 말종인간들의 태도, 현실이 아무리 끔찍해도 견뎌내는 그 초인적인 인내(?)는 그 두려움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무의식적인 두려움 속에서 권력에 매혹된다. <3종조우> 1과 2는 이러한 주제들을 다룬다. “3종조우”란 외계인 체험의 강도를 지칭한다. 예컨대 1종조우는 UFO 목격이며, 2종조우는 UFO의 물리적인 영향까지 체험하는 정도, 4종조우는 외계인에 의한 납치 경험 등등이다. 하지만 그림들은 모두 일식을 관찰하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태양을 볼 수 없다. 태양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 사물이다. 우리는 태양을 보기 위해 광학처리 된 안경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치를 통해서 볼 수 있는 태양은 실제로 우리가 볼 수 없는 태양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태양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무기력하게 만든 다음에야 태양의 위력에 매혹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3종조우 2>에서 태양을 관찰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는 투명한 융기물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과 마주치게 되는 비극을 보여주는 것인가? 영화 <멜랑콜리아>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구와 충돌하는 멜랑콜리아 혜성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물신주의적 부인이라는 주제는 <녹색기반>에서도 변주된다. 언어적 주체는 주어진 상징체계 속에서 기표를 통해서만 자신을 표상할 수 있다. 즉 S 가 로 소외되는 방식을 통해서만, 기표라는 가면을 쓰는 한에서만 상징적 위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언어적 인간에게 분열은 필연이며, 분열이 없다면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 속의 인물은 자신의 토끼 가면을 벗으려한다. 상징적 자살을 감행하는 것이다. 인물은 왜상으로 화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배경에서는 이러한 주체에 관한 지식을 부인한 채 주체 없는 세계의 조화를 찬미한다. 그 조화가 말종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 다원적 조화 속에서 현대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고대적 지혜에 고개를 숙인다. 그것이 이 시대의 삶과 공존 가능한 것인지는 결코 사유되지 않는다. 가혹한 속도로 질주하는 후기산업사회의 피곤한 삶에 안식을 준다면 좋은 게 좋다는 태도다. 배경의 조화로운 세계는 어딘지 이발소 그림 느낌이 난다. 작가에게 뉴에이지 영성주의의 실상은 키치이다.
어떻게 세계적인 파국의 와중에서도 조화와 안정 그리고 행복이라는 환상이 가능한가? 우리는 <유사평정>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은 실재로서 문명이라는 상징계의 한계이다. 자연 앞에서 문명은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이 실재에 대한 불안은 어떻게 해소되는가? 자연을 문명화해서 문명 속에 봉합하는 것이다. 도심에 작은 숲을 조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 봉합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환상 속에서는 가능하다. 우리가 현실에서 평온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현실이 곧 환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아테> 역시 이 문제를 다룬다. ‘아테’는 파멸과 악운의 여신으로 인간을 끔찍한 착각과 경망스러운 바보짓으로 유혹한다.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아테는 “알고 싶지 않다”는 무지의 의지이다. 이 무지가 인간으로 하여금 파국을 부인하여 안도할 수 있게 해준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실재는 현실의 한계이며 그 불가능성에 관한 진리의 계시이다. 이 진리에서는 오직 하나의 현실의 파국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개, 더더구나 말종인간은 진리를 선택하지 않는다. 안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복잡하고 지지부진하게 살 수 있는데 왜 간단한 길을 선택하겠는가? 환상이라는 선택지가 있는데 말이다. 환상 속에서 현실은 불가능성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금지에 직면하고 있다. 현실에 문제가 있다면 그 금지 때문이다. <아테>에서 인물은 잠재성의 장소 외부에 있다. 인물의 얼굴은 빛을 받고 있지만 찬란하지 않다. 그녀는 기로에서 환상을 기웃거리고 있다. 환상의 빛은 푸르스름하다. 메시아의 시간을 상징하는 천사는 절망한다.
<응답>은 이 터질 듯한 긴장의 순간, 진리와 환상 사이에서 결정하는 주체를 보여준다. 그녀의 토끼 가면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조명에 의해 분열되고 있다. 배경은 실재의 상징들로 채워져 있다. 저 뒤에 아직은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존재가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다. <모두를 위한 독백>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모두”가 “모든 사람들”인가 아니면 “전체”인가에 따라 의미는 정반대로 갈라질 수 있다. 단 한사람의 결정이 모든 사람이 존재하는 세계의 잣대를 변경시킬 수 있다. 그러나 “전체”에 대한 환상은 세계의 “비전체성”에 대한 물신주의적 부인일 뿐이다. 우리는 왜상과의 관계를 통해 그 의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왜상은 탈색된 인물은 투과시키지만 중심인물은 지운다. 중심인물은 이 실재가 파국적인 힘을 갖는 세계 속에 존재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의 무의미를 떠안는다.
이제 마지막으로 <숨겨진 조건>을 보자. 작가는 이 그림에 다른 어떤 작품보다 두드러지는 배치를 조성하였다. 사건은 눈부신 창밖에서 벌어지고 있다. 폐공장이다. 여기서 어떤 사건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어두운 뒤켠에서 토끼 가면이 쏟아지는 살덩어리들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다. 화면의 중심에는 눈에 흐드러진 꽃이 핀 인물이 넘쳐흐르는 빛 속에서 아이를 목욕시키고 있다. 마치 아이를 물속에서 빚어내는 것만 같다. 여기에서 파국 앞에 선 작가의 간절한 소망을 읽지 못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분투에서 희망이 잉태되기를 기도한다. 이 희망은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비추는 상서로운 빛은 외부에서 온다. 물론 이 장면은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와 완전히 차단된 실내에서 조망되고 있다. 조명 없는 이 장소는 우리가 작가의 그림을 감상하는 갤러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건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빛이 어둠에 쌓인 실내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카우치에 제대로 누운 것이다. 그 빛을 통해 우리는 환상을 파국적으로 통과하여 알지 못하던 자를 발견할 것이다. 충동이 있었던 곳에 주체가 발생한다면 말이다.
“녹색 파국”에서 이샛별은 과감해졌다. 터치는 유려하고 작품의 완성도는 무르익었다. 그녀는 이 모든 역량을 파국적 현실을 목도하는 데 바쳤다. 그리고 녹색의 의미를 변경시켰다. 두껍기만 하던 삼차원의 현실은 모니터 패널에 불과할 정도로 가벼운 이차원의 평면으로 축소되었다. 그녀는 결정의 조건을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