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샛별의 ‘귀환’을 꺼내 놓고 천천히 묵상하며 보고 있노라니 불현 듯 손세실리아 시인의 ‘곰국 끓이던 날’이 떠올랐다. 그 시의 둘째 연이다. “그랬구나/ 평생 장승처럼 눕지도 않고 피붙이 지켜온 어머니/ 저렇듯 온전했던 한 생을/ 나 식빵 속처럼 파먹고 살아온 거였구나/ 그 불면의 충혈된 동공까지도 나 쪼아먹고 살았구나/ 뼛속까지 갉아먹고도 모자라/ 한 방울 수액까지 짜내 목축이며 살아왔구나/ 희멀건 국물,/ 엄마의 뿌연 눈물이었구나”
‘귀환’은 덤덤한 그림이다. 그러나 그 특별한 감정의 동요 없이 그저 예사롭기만 한 그림을 천천히 보고 있으면, 무언가 낯설고 슬픈 감정이 복받치는 걸 느낄 수 있다. 왜일까? 그것은 작가가 명명해 놓은 작품의 이름 ‘귀환’ 때문일지 모른다. 귀환(歸還)의 뜻은 다른 곳으로 떠나 있던 사람이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거나 돌아감이다.
한 사람에게 ‘본래 있던 곳’은 어디일까? ‘자리’가 아니라 ‘곳’이니 이때 ‘곳’은 낯선 위치로서의 추상적 공간이 아니라 친밀한 장소임을 또한 우리는 알 수 있다. 지금은 흔히 쓰는 말이 아니지만 고향의 다른 말로 ‘본향(本鄕)’이란 게 있다. ‘본디의 고향’이니, 그 말뜻에 ‘본래 있던 곳’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자, 그렇다면 이 그림의 속뜻은 두 개의 맥락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맨 앞에 앉은 여성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그녀는 눈에 붉은 꽃을 올렸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맥락에서의 염(殮)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이렇듯 붉은 꽃을 올리지는 않았으나 예부터 사람들은 죽은 이를 염 할 때 동전을 올리거나 천을 덮었다. 그렇다면 ‘귀환’은 이 여성의 돌아옴을 상징화 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앞의 상징을 더 구체화 한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죽음에 관한 상징물은 이 그림의 전체에 깔려 있다. 영혼을 인도하는 검은 새(까마귀), 긴 세월의 주름(대지), 삶의 희노애락(사건의 장면성을 보여주는 배경), 흰 나무(火葬)…. 다섯 인물들은 ‘그녀’의 가족일 수도 있고 ‘그녀’의 자매들일 수도 있으며, ‘그녀’의 다른 자화상일 수도 있다. 어쨌든 작가는 그녀의 귀환을 상징화함으로써 모든 그녀의 그녀들로 하여금 ‘초혼(招魂)’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 나는 그녀를 내 어머니로 생각해 보았다. 이번 주 주말이 어머니 칠순이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비현실이나 초현실처럼 저 멀리, 나와는 다른 곳에서 살았다. 그렇다고 내가 어머니의 뿌연 눈물을 먹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에게 ‘귀환’은 늘 어머니에게 돌아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