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머렐드 빛의 푸르른,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고 불안한 색감과 정조가 화면 가득 드리워져 있고, 그 안에는 갖가지 낯선 느낌의 이질적인 것들이 의뭉스러운 형상들과 이야기들을 엮어내면서, 전체적으로 흐느적거리는 유동적인 느낌들로 인해 어떤 묘한 울림을 자아내고 있는 것만 같다. 작가의 근래 작업들을 처음 보며 떠올랐던 대략적인 느낌들이다. 작업의 전체적인 의도도 그렇지만 이와 연동되는 이들 개별적인 도상, 이야기들 속에도 나름의 개념적인 이유들이 담겨있어 하나하나 그 속내를 읽어내야 할 것만 같은데 간단치 않은 일로 다가온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작가가 전하려 한 것들이 그 이상하고 복잡한 양태들로 인해 비현실적으로 다가올지라도 결국은 우리의 현실과 관계된 것들이며, 이들 수다한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가로지르는 무언가 긴 호흡의 묵직한 메시지들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조적인 현실의 차원들 말이다. 이는 쉽게 볼 수 없는, 혹은 보여 지지 않는 우리의 비가시적인 이면, 혹은 바깥에 관한 것들이 아닐까 싶은데, 이를 담아내고 드러내는 전략과 방식 또한 작가의 치열한 그리기의 노력들과 그 개념적인 두께, 방식들로 인해 만만치 않기만 하다. 그렇지만 우리를 둘러싼 실제 현실의 더 이상하고도 복잡다단한 양상들을 생각해보면 못내 수긍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스스로의 관심사가 늘 리얼리즘이라 말한 것처럼, 그 묘하고도 기괴한 느낌의 화면 속 형상, 이야기들로 비록 뒤틀리듯 꼬이고 얽혀있을지라도 화면 밖의 실제 현실들과 접합되어 있다.
자연스럽고 견고해보이지만 숱한 모순들과 균열들로 가득한 현실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작가가 취한 전략, 방식은 환상적이고 허구적이며, 이를 통해 실제 현실을 작가에 의해 새롭게 생산된 또 다른 현실들과 관계 맺도록 하는 것들이다.
환상적, 마술적 리얼리즘과도 연동될 수 있는, 작가 특유의 이상하고 모호한 비현실적인 현실의 풍경들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믿고 있는 단단하기만 한, 그러나 좀처럼 쉽게 보이지 않는 세상의 논리들을 뒤흔들며 어떤 균열과 파열을 도모한다. 그렇게 작가는 우리를 둘러싼 현실 사회 이면의 것들, 이를테면 구조적인 폭력들과 같은, 우리의 모순적인 실재들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들 억압적인 현실을 담은 익숙한 여느 풍경들과는 다소 다른, 실제 현실의 과잉이거나 결핍인 우회의 풍경들로 기묘하게 다가온다. 환상적인 허구의 것들을 개념적으로 더하고, 그만큼 실재의 본원적인 것들의 여지를 남겨두는 역설적인 가시화를 통해 다시 실제의 현실과 관계 맺도록 하는 것이다. 복합적인 느낌으로 그 감추어진 속내, 혹은 바깥의 것들을 긴장감 가득, 궁금함과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면서 말이다.
이를테면, 작가의「녹색 에코(Green Echo)」연작들의 경우, 현행 신자유주의 하의 녹색의 이데올로기의 모순들을 문제시한다. 여기서의 녹색은 원래의 자연을 의미하는 생명과도 같은 의미가 아니라 문명 속에서 재 전유된 자연, 인공화 된 자연, 곧 위선적이고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뜻한다. 2013년 전시인, 「녹색 파국」에서부터 부각되고 발전된, 녹색 개념은 이렇듯 인위적인 사회적 환경을 상징하는 색이자 이전 작업들에서 천착한 보호색처럼 스스로의 본래 모습을 숨기거나 미화시키는 ‘위장’의 개념이 결합된 복합적인 의미로 자리를 잡는다. 눈에 보이는 쾌적하고 너른 자연을 뜻하는 일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면의 비가시적인, 냉혹하기만 한 현실의 모순적인 시스템을 감추고,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장막처럼 녹색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작가의 녹색은 순수하고 단일한 의미의 녹색과는 거리가 있고 모호하고 의뭉스러운 현실의 어떤 국면들과 감각, 개념적으로도 맞닿아 있다. 그리고 같은 주제의 작품들 속에는 종종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유동적인 형상, 이미지들이 자리하는데, 화면 속 혹은 밖, 실제 현실과의 어떤 연결들을 암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결국 관건은 작가 작업들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실제 현실과의 연결들, 그 특정한 양상들일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작가의 작업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꽃이나 가면의 설정들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화면 속 인물들의 얼굴을 대신하고 있는 꽃이나 가면 개념은 작가의 독특한 시선 개념에서 연원하는 것들이다. 작가의 시선 개념은 일반적인 의미의 바라봄이 아니라 시선 자체를 의문시하고 있다. 환상적이고 허구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변형시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작가 작업에서 종종 등장하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꽃이나 가면은 실재의 시선들을 은폐, 위장하고 있는 자아의 허구, 환상들을 의미한다.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는 정합적인 관계가 아니라 환상적인 허구에 의해 실제 현실과의 왜곡, 불일치의 불안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흔들리는 유동적인 주체(의 시선)를 설정하고 있는 셈이며 이렇듯 현실과의 굴절된 시선의 관계맺음을 통해 그만큼 숱한 타자들에 의해 정향된 것들이 가시화된다. 그렇기에 익명의, 그러나 수다한 것들로 웅성거리는 흔들리는 존재들이며, 볼 수 있는 눈, 얼굴의 이미지 대신에 굴절된 현실의 무언가가 보여 지는 형상들로, 왜곡되어 뒤틀린 채로 변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비정합적인 시선들에 더해, 인물들을 둘러싼 풍경들도 종잡을 수 없는 형상들로 가득하다. 정신분석적인 담론들과 개념적으로 연동된 작업들도 의문스러운 도상들을 둘러싼 전체적인 배치, 구성이 좀처럼 쉽게 파악되지 않는 모호한 느낌들을 더하지만, 「녹색 에코」 연작들에서도 유령과도 같은 인물들만큼이나 이들 인물들을 에워싸고 있는 얼기설기 얽힌 정글 숲의 흐느적거리고 유동적인 이미지들과 종종 등장하는 화면 속 베일들이 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잠시 가로막아 흔들리도록 한다. 마치 이들 연작의 전체제목에서 말하는 에코(echo)개념처럼 어떤 알 수 없는 울림이 화면을 진동시키고 있는 것만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통상적인 의미의 녹색의 풍경, 이미지가 아니라 불안한 느낌의 무언가 가중되고, 삭감된, 그렇게 변형되어 되돌아온 풍경들로 다가오는 것이다. 작가가 말한 에코 개념인 울림, 반향의 의미일 것이다. 정합된 시선에 의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텅 빈, 일종의 반 시선에 의해 가감된, 왜곡, 굴절되어 변형되어 되돌아온 회귀의 이미지, 풍경들을 통해 이접적인 방식으로 현실과 다시금 관계 맺도록 하는 셈이다. 그렇게 우리의 시선에서 제거되어 보이지 않은 것들이 가시화되어 현실로 회귀한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제거한 것들의 이야기는 우리 삶에 구성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가리고 숨기고 아니라고 거짓을 말해도 그것들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보지 않으려고 억압한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끝끝내 당신의 삶 속으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문득, ‘단지 보이지 않을 뿐, 현실에서 사라진 것은 없고 다만 그 주위를 돌고 있을 뿐이다’라는 어떤 말이 떠오르는데 작가의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의 풍경은 비가시적인 유령처럼 현실을 맴돌면서 회귀의 울림, 몸짓들을 통해, 때로는 그 이면들을 감추고, 때로는 부풀린 과잉을 통해, 실재의 의뭉스럽기만 한 현실들을 부단히 소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을까, 이질적인 관계들로 뒤얽혀있는 은폐된 현실을 들추어내기 위한 작가의 독특한 작업 방식 또한 흥미롭기만 하다. 현실 못지않은 복잡다단하고 이상한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위해 작가는 우리의 현실을 안팎으로 둘러싼 다양한 것들을 관찰, 채집하고 재배치, 구성한다. 회화를 둘러싼 여타의 모든 것들, 이를테면 철학, 과학을 위시한 이론적인 것들부터 시작하여 (SF) 영화, 소설은 물론, 만화적이거나 영화적인 기법들도 마다하지 않으며 종종 온라인을 활용한 디지털 세계들도 작업의 구성 요소로 활용한다. 이 또한 지금, 여기 동시대 우리 현실의 한 모습들일 테니 말이다. 이러한 면모들로 인해 복합적이지만 그만큼 현실적이기도 할 것이다. 눈여겨 볼 것은 그림의 배경, 요소들로 사용하고 있는 이미지들을 현실의 것들은 물론, 인터넷 검색 결과들을 통한 무작위적인, 혹은 불일치의 모순적인 것들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들 이미지들의 재배치, 구성에 있어 영화적인 카메라 워킹이나 앵글들은 물론, 꼴라주나 몽타주, 미장센의 방식들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것들이 이질 혼융된 모순적인 현실(과의 관계)들을 가시화시키기 위한 나름의 기법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서로 무관한 것들의 인접, 병치를 통해 또 다른 (너머)의 현실을 드러내려 한 초현실주의 그것처럼 작가 작업에서도 이들 짜깁기된 이미지들의 배치, 구성을 통해 복잡다단한 현실과의 모순적인 관계들, 그 이질적인 공존을 모색하려 하는 것만 같다. 특히 이러한 면모는 비교적 자유로운 이야기의 직접적인 표현, 구성일 수 있는 만화적인, 드로잉에 일찍이 익숙한 작가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는 동시에 최근의 디지털 환경, 생태계와도 쉽게 연결될 수 있는 면모들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러한 자유로운 매체의 결합은 모순적인 현실을 담아낼 수 있는 방편인 동시에 또 다른 잠재적인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현실을 향한 작가의 지속적인 확장의 노력을 생각했을 때도 의미 있는 관심과 접근들이 아닐까 싶다.
동시대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은 변화된 현실을 꾸준히 포착해내려는 작가적인 노력에 다름 아니며, 그런 면에서 지금, 여기의 달라진 지형, 현실에 대한 것들은 계속해서 작가의 작업과 관계하는 주요한 화두이자 맥락, 구성요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최근 작가가 준비하고 있는 작업들의 경우도 코로나19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동시대 현실에 관한 것들이다. (원고를 쓰는 지금 시점에서) 진행 중인 작업이라 그 전모를 일갈하여 말할 수 없지만 언 듯 눈에 띄는 것들은 화면 곳곳에서 보이는 픽셀들의 설정이다. 일상에서 흔히 말하는 (깨진) 픽셀은 사실 근접, 확대된 시점에서 본 이미지일 뿐이며 그렇기에 깨져있는 동시에 이미 형성된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들 (미)분화된 이미지들이 여러 겹의 프레임들로 화면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다중적인 현실의 어떤 면모들로 향하고 있는 것만 같다. 꽃, 가면에 이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픽셀 이미지는 이미 전작들에서도 일부 시도된바 있지만, 인공지능, 디지털 환경과 비대면, 비접촉들로 인해 더욱 전면적으로 지워지고 있는 지금 시대의 익명화된 주체성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를 포함하여 여러 층위의 레이어, 프레임들로 구성된 세상의 풍경들 또한 작가의 전작에서 볼 수 있는 장막, 베일들이 더 다중화 되고 복잡해져 점차 무화되고 있는 동시대의 어떤 현실, 그 특정한 국면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종국에는 확대를 거듭하여 화면 가득, 커다란 무(無)로 향해 진행 중인, 지금, 여기의 유동적이고 불안하기만 한 현실 말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렇듯 현실을 향한, 어떤 개념적인 사유로 이끌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업은 또한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들에서 개념적으로 차용, 혹은 가시화시키고 있는 예를 들어 정신분석학의 담론적인 틀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들,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어떤 독특한 태도, 관점들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작가의 작업에 반복적으로 되풀이하여 드리워져 있는, 혹은 작업 자체로 기능하는 장막과 현실과의 특정한 관계들 말이다. 분명 작가의 작업은 특정한 이론적 틀을 시각화시키는 형상, 이야기들을 엮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들로 인해 좀 더 깊고 풍부한 현실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한 것도 있겠지만 그림은 사유에 관한 것이면서도 이러한 개념적인 사유를 넘거나 가로지르는 감각의 차원이기도하기에 이에 대한 해명도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시선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업은 시각적인 것, 이야기들의 과잉, 결핍으로 가득하기에 오히려 이들 개별적인 시각적 형상, 담론들을 가로지르는 전체적인 스타일이나 색조, 분위기가 먼저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이러한 시각 자체를 넘어서는 촉감, 질감의 느낌들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특히나 예전 작업들에서 볼 수 있는 계획, 구성된 도상, 이야기들의 배치, 구성이 점차 끊임없는 이미지들로 유동하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인 것들로 이동하고 있기에 이러한 느낌들은 더욱 가중된다. 이를테면, 작품의 특정한 주제들과 연동되는 불온한 느낌의 색감이 음울한 현실의 그것들을 떠올리게 하고, 화면 가득 흐느적거리며 넘쳐흐르는 유동의 시각적 형상, 질감들이 감각을 진동케 하는 식이다. 앞서 언급한 현실의 울림을 변형, 증폭시키는 회귀의 느낌은 이렇듯 감각적으로도 분명하게 전해지는 것이다. 현실과의 엇갈린 통로처럼 설정한 개념적인 장막들, 혹은 구멍, 흔적들이 화면 전체로 확장되어 굳이 화면 속의 구성요소로 설정할 필요도 없이, 다시 말해, 작가의 작업 자체가 점차 엇갈린 현실의 모순 자체를 담지 하는 존재론적인, 감각덩어리로 되어 가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측면이다. 현실을 향한 수다한 이야기들 못지않게 이들 이야기를 담아내는 작가의 숱한 그리기 행위들을 반복하여 거듭했기에 어쩌면 개념들마저 감각화 되고, 다시 이들 감각들이 개념적인 실체들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마치 그 경계면에 자리한 (개념적으로) 모호하면서도 (감각적으로) 뚜렷한 저 현실들을 작가가 부단히 접합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왜곡되고 뒤틀린 모순적인 현실을 굳이 애써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스스로 그러하게 도드라지는 유동적인 현실의 어떤 실체들로 다가온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실체는 현실을 향한 그 모든 개념적이고 감각적인 변형, 확장들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또 다른 실재(實在)이기도 한 회화인 채로 자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변화되고 있는 현실을 향한 작가의 부단한 사유의 접근들, 그리고 이와 연동되는 지속적인 갖가지 회화적인 시도와 변신의 노력들을 통한 작가 고유의 화법(畵法, 話法) 구축은 작가 작업의 의미 있고 소중한 미덕으로 적시해야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