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자연의 색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인공적인 색인 녹색은 지난 10여 년 사이 이샛별 회화의 주요한 키워드 역할을 하였다. 《녹색 파국》(2013), 《녹색 에코》(2017,2018, 2019) 등 그간 이샛별의 개인전 제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녹색을 정면에 내세워 오늘날의 사회에 만연한 시스템적인 불합리와 오류, 모순, 그로 인한 병폐 등을 꼬집었다. 그는 딱히 녹색을 애호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에게 있어 녹색은 이 사회의 시스템이 리얼을 페이크로 위장하고, 노골적으로 욕망을 조장하여, 과잉과 독성으로 훼손된 풍경을 이룰 때 그 전체를 휘감는 색이다. 처음부터 회화나 드로잉 작업에서 현대 사회의 병폐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온 이샛별은 2013년경 기후 및 생태계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캔버스 화면을 녹색으로 채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장 자연적인 색이라 일컫는 녹색은 과거에 자연을 흉내 낸 색으로 불경하게 취급되기도 했지만, 오늘 날 녹색은 자연을 넘어서 이상화된 삶을 대변한다. 녹색은 이미 트렌드와 대안이 되어 버린지 오래고, 점점 더 강력한 자본을 요구하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대가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고 하였다.
이번 전시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신작 <휴먼 그린 휴>(2022)는 두어 가지 색으로 색채를 제한하여 단순하게 그린 인물 초상 연작으로, 인물의 응시 각도나 손의 제스처, 헤어스타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창백한 청록색 톤으로 인하여 이 인물들은 서스펜스극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의뭉스럽다. 디테일한 묘사가 없기에 슥슥 편하게 그린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볼수록 어떤 시각적 불편함이 감지되는데 인물의 얼굴과 손의 부조화가 그것이다. 어떤 그림에서는 절대 한 사람의 얼굴과 손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얼굴 가까이에 가 있는 손의 크기나 동작, 좌우 방향이 어색하다. 사실 이샛별은 이 초상 연작을 제작할 때 인터넷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사진들을 참조하여 짜집기 하였고, 심지어 대부분의 그림에서 얼굴과 손이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작가는 창백한 청록색조에도 공을 들였다. 색조로 분위기를 장악하는 것은 이전의 <진공지대>(2014) 시리즈에서도 보여준 바 있으나 그때처럼 장엄한 서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번 신작은 스냅사진과도 같은 단발적인 인물의 포즈다. 개별적으로 인물을 들여다보게 되면 제각각 심취해 있는 순간이 느껴지지만, 전체적으로 모아진 그림에서는 마치 샴푸나 염색약 모델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작가가 사용한 색이 물감이 아니라, 공장의 폐수, 녹조가 잔뜩 낀 강물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머리카락 부분에서 유난히 진하게 흘러내리는 물감 자국이 더이상 단순하게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한편, <픽셀 휴먼>이나 <얼굴 없는 얼굴> 등 이전 인물 초상 작업들에서 작가는 인물의 눈을 모두 픽셀처리 하거나 뭉그러지게 표현해 온전한 시각 주체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이번 <휴먼 그린 휴>에서는 얼굴을 덮거나 일부분을 가리는 헤어 스타일이 눈에 띄는데 전체적으로 간결한 붓질로 인해 눈 표현을 최소화한 것 같지만 기실 텅 빈 눈 그 자체다. 작가는 유년 시절 만화 일러스트에 심취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만화 캐릭터는 눈을 어떻게 묘사하는지에 따라서 인물의 성격, 기분, 감정이 설명된다. 인물의 얼굴에서 눈이 하는 역할을 잘 알고 있을 터, 작가가 매번 인물의 눈을 의뭉스럽게 만드는 이유는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온전한 시각 주체로서 얼마나 확신을 가질 수 있느냐는 문제의식을 회화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사각 숲>(2022)은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풍경 안에 각기 한쌍의 인물들이 존재하는 그림이다. 이들의 두상 전체가 픽셀화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유형의 인물인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두상과 반대로 꽤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의상 스타일을 통해서 짐작해본다면 요즘 시대의 젊은이들로 보인다. 만약 특정인이라면 초상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블러 처리하듯 픽셀화 해준 셈이다. 이 그림들은 이전 <녹색 에코>, <레이어스케이프> 시리즈에서 풍경과 인물을 병치하였던 방식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작가는 주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이미지를 수집하고 재배치하는 바, 그의 작업은 현실을 새롭게 구성 가능한 것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작가는 기존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재조합 하여 새로운 사건을 구성하곤 하는데, 그렇게 구성된 풍경은 끝이 눈앞에 있지만 보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왔던 삶이 사실은 끝났음을 인정하는 것이자, 새로운 삶의 질서는 아직 떠오르지 않는 상태로 규정한 발명된 풍경이라고 하였다. 이 만들어진 풍경 안에서 인물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어쩌면 <사각 숲> 내의 풍경은 셀 수 없이 많은 이미지가 과잉 소비되어 그 속도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현실의 풍경보다는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느긋한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숲 속에서 조금도 조급해 보이지 않는 인물들의 포즈가 대변해준다. 한편, 이렇게 생략되고 모호한 이미지를 읽어내려 애쓰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실제 디지털 이미지를 대하는 상황과 동일하다. 이미지를 둘러싼 테크놀로지는 끊임없이 갱신되고 미래를 제시하지만, 동시에 시각 주체들은 그 이미지를 활용, 응용함에 있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속도를 따라잡거나, 늦추고 있다. 여기에는 초상권을 지키기 위한 저항의 방식도 포함한다.
한편, <안개>(2022) 시리즈나 <슬퍼할 것이 없다>(2022)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작가의 취향, 그리고 이들 매체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 서스펜스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안개>는 전체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수풀 속 한가운데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인물들 같다. 이중에서 토끼 가면을 쓴 인물은 예전 작업에서도 종종 등장하곤 했는데 작가 본인으로 유추된다. 작가는 명확한 서사를 전달하지는 않지만 화면 구성이나 인물의 상황과 포즈를 볼 때 영화의 미장센이나 전형적인 클리셰를 활용하곤 하여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렇게 그려진 화면은 픽션의 한 장면으로 여겨도 충분하고, 모호하고 은폐된 현실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수성 연필로 작업한 <슬퍼할 것이 없다>는 동그란 화면을 만화 캐릭터의 얼굴로 꽉 채운 드로잉 시리즈다. 작가가 유년 시절 즐겨 그리던 만화 캐릭터들에 대한 감수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종이에 수성을 사용한 탓에 종이는 우글거리고 원의 가장자리에는 얼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얼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커다란 눈은 만화 작법의 특징이다. ‘슬퍼할 것이 없다’는 말은 불교 경전의 구절에서 인용한 것일 수도 있고, 사회 문제나 개인적 사건에 대한 작가 나름의 어떤 소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화 작법에서 죽은 눈이라고 하는 동공이 풀려 흐려진 눈보다도 훨씬 그로테스크하고 텅 빈 눈에 가깝게 그려진 이 드로잉들에서 우리는 슬픔의 감정을 떠올리기 보다는 블랙홀 같은 공허를 응시해야 할 것 같다.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현상과 사건, 이미지들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볼 수도/보지 못할 수도 있다. 이샛별의 녹색 눈은 그러한 시각 주체를 가리키며, 이 녹색 눈에게 필자는 볼 수도/보지 못할 수도 있다지만 해질녘 찰나의 순간에 수평선을 넘어가는 태양으로부터 기인하는 녹색광선을 기다리게 하고 싶다. 그 낭만을 기다리는 눈이 되고 싶다.
이샛별, “녹색 에코”, 『이샛별』, 2021, p. 74.
이샛별, “레이어스케이프”, 위의 책, p.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