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샛별은 최근의 ‘그린 에코(Green Echo)’ 연작에서 끈적끈적하다고 느껴질 만큼 강한 물질감을 가진 녹색조의 화려한 선들로 이루어진 숲의 풍경을 그렸다. 여기에서 숲은 모든 세부들이 상호 긴밀하게 연결된 유기적인 전체로서 구성되어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역동적이며,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비밀의 숲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중앙에 서 있는 남녀 커플은 보는 이의 시선을 육박해오는 초록색 숲의 감각적인 생생함에 비해 허상처럼 보일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 이 연작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은 얼굴이 없거나 눈동자가 빈 것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며, 결과적으로 이 숲 안에 발 딛고 서있는 자로서의 육신적인 존재감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을 집어삼킬 듯한 숲의 야생적인 생생함과 대조되는 이 존재들의 무력감은 이샛별이 그리는 숲을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 불길한 곳으로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풍경과 인물 표현이 함의하는 바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간의 작업이 발전해온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샛별은 2001년 첫 개인전 ‘위장’에서 꽃을 위상술에 대한 상징물로 등장시킨 이래, 꽃과 같은 자연물을 인간을 도취시키고 마비시키는 환각과 같은 가짜 아름다움에 대한 환유로서 활용해왔다. 2006년 개인전 ‘봄날은 간다’에서 프린트된 무궁화 꽃들 위에 그려진 웃는 인물상들은 국가 권력이 조성한 환경, 즉 이샛별이 인공적인 생태계라고 인식하는 체제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소시민적 삶을 상징한다. 2009년 ‘The Real’ 전시에서부터 이샛별은 그가 관심을 가졌던 정신분석학적 구조에 입각하여 표면으로 드러난 것과 잠재된 것, 현실사회와 그것이 거세하고자 하는 무의식 간의 상호관계를 시각화했다. 당시의 작업들에서는 작가 자신을 상징하는 인물이 마치 서로 다른 역할극 무대에 선 주인공들처럼 여러 국면의 캐릭터로 나타나면서, 일종의 운명 공동체를 이룬다. 이를 통해 작가는 현실사회에 길들여진 상징계의 자아와 진짜 자기 존재 사이의 복잡한 관계망을 도상화하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긴장, 폭력과 희생, 밀고 당기는 역학의 게임을 단일 평면 안의 회화적 서사로서 구현하였다.
2013년 개인전 ‘녹색 파국’에서부터 이샛별의 작업에서의 녹색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 녹색 배경 중간 중간에는 현실의 상을 왜곡시키며 녹아내리는 벽처럼 보이기도 하는 웜홀(Wormhole) 같은 구멍이 등장한다. 이는 흡사 영화 <매트릭스(Matrix)>에서 표현된 바 있는 코드화된 기호들의 세계들과 진짜 세계 사이의 유동막처럼 보이기도 하며, 막 밖에 있는 비정형의 실체가 유출되는 통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샛별은 이 알 수 없는 구멍들로부터 녹아내리는 형질들이 체제화된 세계를 이미 잠식하기 시작한 듯 보이는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사회에 포섭되지 못한 채 잠재된 것들의 반격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가능성은 최근의 ‘그린 에코’ 연작에서, 상징물의 배치에 의한 서사가 약화되고 녹색 숲 안의 구멍 이미지가 작품 속에서 보다 중요한 구성적 역할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더 분명하게 전해진다.
사회가 만들어낸 인공적 생태계를 의미하는 숲과 그것에 무비판적으로 적응하는 영혼 없는 인간들의 모습, 그리고 그 숲의 세계를 녹여버릴 듯 느닷없이 개입되는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시선. 이샛별의 최근 작업 속에서 세 요소들 간의 역학 관계는 상징적 의미를 전하는 도상적 기능에 그치지 않고, 보다 감각적인 붓질에 의한 회화 자체의 결을 통해서 일련의 형식미를 획득하고 있다.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관계, 드러난 것과 잠재된 것들 간의 역학 게임이 한편으로 회화 요소들 간의 게임으로 체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람직한 진화로 보인다. 이미 담론화된 정신분석학적 구조를 자명하게 시각화하는 것만이 이샛별의 회화적 목표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 자체가 규명할 수 없는 것을 과학화하려는 시도였다면, 그 과학화의 틀에서조차 벗어날 수 있는 이미지의 자유로움을 붓질에 의해 육화시킬 수 있을 때 회화 평면은 비로소 막 뒤에 감춰진 진짜 세계가 유출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샛별은 이렇게 말한다. “현실의 약한 고리에서 발생하는 이 예술적 망상은 폐쇄된 현실을 불확실성을 향해서 개방한다.” 그의 회화는 결국 실재를 구원할 수 있을 절대적 시선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망상을 위한 자리인 것이다.